산짱을 제주도의 땡볕 아래 떼어 놓고 나만 홀로 서울로 와 눅눅한 습기 속에 있다.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기분이 너무 이상하다. 혼자 집에 앉아서 창문을 열어 놓고 스탠드를 켜고, 컴퓨터 앞에 앉아 타이핑을 하고 열어 놓은 창문에서 눅눅한 바람이 불어오고 나는 미지근한 차를 한잔 마시고 그리고 책을 읽는다. 그것은 마치 3년 전이나, 5년 전과 같은 그런 일상이어서 나는 마치 어떤 시간을 건너 뛰어온 기분이 든다. 마치 긴 꿈을 하나 꾸었고 그 꿈에서는 내가 예쁜 아기의 엄마가 되었고 그 아기가 꽤 커서 엄마엄마 말을 하며 옷스스, 하며 옥수수를 먹고 즈쑤, 하며 쥬스를 마시고 이제 막 송곳니가 나는 장면까지 꿈을 꾼 것 같다. 잠에서 깨어보니 뭔가 가슴이 텅 비어있다. 이루어지지 못한 긴 사랑의..
월요일 오후가 되니 주말을 달려온 피로가 가득 아기가 혼자 놀게 방치해 놓고 빨래를 하고 아기 밥을 하고 어른 밥도 하고 다시 또 청소를 하고 나니 아기는 눈을 꿈벅꿈벅 한다. 이제 겨우 아기를 안는다. 지친 아기는 품에 안기자 마자 바로 잠이 든다. 외로운 세상으로 널 데려와서 미안하다고, 그래도 가장 큰 사랑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미안하다, 아가. 사랑이 부족한 엄마는 아가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한다. 미안하다, 아가 다시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을게.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말해서 미안하다.
산짱의 진정한 첫번째 겨울이 지나갔다. 이제는 정말 날씨가 풀렸네. 동물원 반대론자인 엄마는 아직도 산짱과 동물원에 갈지 말지를 결정하지 못했다네. 산이는 팽귄과 기린과 사자와 코끼리와 곰과 고양이를 사랑한다네. 그리고 산이는 ELO의 mr skyblue를 사랑하지. 이 아가의 머릿속에 무엇이 있을까. 이 아가의 세상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엄마는 늘 뭔가를 제대로 해 주지 못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든다네. 늘 경이롭고, 늘 미안하고, 늘 사랑한다네. 사랑한다, 내 아가.
조용한 방 안에 가습기가 물방울을 만들어 내는 소리와 작은 숨소리가 들린다. 텅 비어 있는 방이, 무언가로 가득차 있는 것만 같고, 사실 실제로도 그렇다. 삶 역시 텅 비어 있는 것 같지만 무언가로 가득차 있는 것만 같다. 실제로도 그렇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루 종일 아기와 살고, 아기를 위해 살고, 다시 아기를 위해 존재한다. 남편은, 직장이 있고, 해야할 공부가 있고, 운동을 한다. 그 삶 속에 아기의 이유식이나, 아기의 놀잇감, 아기의 옷, 아기의 기저귀, 아기의 장난감 따위는 없다. 남편은 시간이 나면 아기의 이유식을 만들거나, 아기를 위해 청소를 하거나, 아기를 위해 쇼핑을 하거나, 아기를 위해 놀이를 구상하거나 하지 않고 남편의 시간을 가진다. 더 운동을 하거나, 더 책..
우공군이 동영상 편집에 꽂혀 있던데, 나도 어제 찍은 사진으로 동영상을 만들어 보았다. 아주 오래전에 편집 한번 해 보고 해본적이 없는데다가 시간이 너무 없어서 싱크로도 안맞는다. 그래도 울 아가가 너무 이뻐서 엉터리 같은 편집도 압도한다. p.s 울 산짱 이제 곧 있으면 돌인데 걷기도 잘 걷고 글자도 읽고 혼자 티비 켜고 끄고 음악 듣고 싶으면 씨디 가져오고, 나가고 싶으면 현관문 손으로 가리키고, 고양이, 강아지, 오리 구별하고 각각 소리따라하고 (요즘 고양이에 꽂혔다. 책도 고양이 책만 같이 읽잔다) 오늘은 윙크도 하고 (물론 두 눈을 다 감지만, 근데 한쪽 눈썹 올리는건 되게 잘한다) 아, 이뻐서 죽을 것 같다. 협재는 여전히 아름답다.
흥분과 감동이 흔한 나에게 누군가가 말했다. 서른이 넘으면 그렇지 않을 거라고. 서른을 넘겨 보았는데, 난 아직도 여전히 감동과 흥부이 잦다. 경험이 쌓이면서 시덥지 않은 것들은 더 시덥지 않아졌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흥분할만큼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이 많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장 흥분되고, 가슴떨리는 순간은, 꽤 괜찮다고 생각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이다. 지금 막,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고 나를 가슴 떨리게 한 그것으로 3년 후 책을 낼 계획을 지금 막 세웠다. 사실 그것은 대단한 작품이나 대단한 철학적 깨달음은 아니다. 앞으로 3년 동안 읽을 책에 대한 계획이고 그것이 오히려 가슴 떨리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알아가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한 희망이야말로 인생을 살아가며 가장 멋진 일일 것이다. 더..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제주에 있습니다. 저의 작은 분신 산짱과 함께요. 뒤에 보이는 집은 쉬멍민박 입니다. 지난해에 왔을 때보다 나무들이 무척 많이 자라 정원이 너무 예쁩니다. 서울은 비가 많이 왔다는데, 제주도는 연일 화창하고 날이 무척 더웠습니다 반짝반짝 햇빛속에서 산책하고 수영했던 산짱 새까맣게 탔습니다. 정말 발바닥과 발등의 명암차가..... ㅠㅜ 쉬멍민박 정원에는 제주 채송화도 피어 있습니다. 멀리 이끼 꽃도 함께 피어 있군요. 제주 채송화가 정식 명칭은 아닌데 이 곳에서는 그렇게 부르더군요. 책을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정원 한 구석에 상사화도 피었습니다. 제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꽃입니다. 가녀린 꽃대에서 불꽃처럼 꽃이 터져 나왔습니다. 산짱은 여전히 카메라를 사랑합니다. 사진 찍는 것이 아..
기도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저의 등불이 되어주시고 저의 안식처로 저를 인도하소서. 저와 저의 아기가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시며 평화를 누리게 해 주소서. 제가 무지할 때 우주와 만물의 법칙을 일깨워주시고 제가 길을 잃었을 때 저의 등대가 되어 주소서. 제 마음 속에 강함이 있음을, 그 강함이 한없이 부드러울 수 있음을, 그 부드러움 속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이 있음을, 그 굳건함 속에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음을 깨닫게 해 주소서. 저에게 용서의 힘을, 그리고 그 힘에 대한 믿음을 주시옵고 저로 인해 세계가 변할 수 있음을 일깨워주소서. 제가 사랑하는 것을 지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고 그 용기로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해주소서. 망각의 축복을 저희에게 내려주시고 그 축복 안에 은총으로 우리를 감싸주소서...
이렇게 마음이 아파본 적이 있을까.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울리는 진동을 이렇게 느껴본 적이 있을까. 아가. 내 사랑하는 아가. 네 볼만 만져도 네 손만 잡아도 네 눈만 보아도 가슴이 벅차다. 아가. 내 사랑하는 아가. 그 누구때문에 이렇게 가슴이 아파본 적이 있을까. 나는 너만 생각하고 또 너만 생각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너. 그 말로도 부족한 너. 내 진심과 내 모든 것을 다 차지하고 있어도 더 많은 것을 주지 못해 언제나 미안하다. 아가. 내 사랑하는 아가. 내가 널 지켜줄게. 꼭 너를 지켜줄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가가 되도록 엄마가 꼭 지켜줄게.
+ 새로운 룸메이트를 집으로 들인지 100일이 되어간다. 시간은 참으로 빠르고, 룸메이트는 놀랍게 빨리 자란다. 나는 아직도 겨울이 익숙하지 않은데, 오랜만에 접속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 오른쪽은 온통 봄옷들이다. 세상이 어떻게 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사춘기 시절처럼 불투명한 미래가 불안하기만 하지만 아기는 웃고, 거기에서 잠시 모든 것을 잊는다. + 사람의 인지 능력에는 컴퓨터처럼 용량이 있듯이 사람의 사랑에도 용량이 있다. 새 룸메이트 덕분에 원래 룸메이트는 헌 룸메이트가 되었고 나는 여느 부부들처럼 불만 많은 아내가 되어 있다. 그동안 참았던 것들이나 잊고 있었던 것들이 봇물처럼 터지고 나는 잠을 자면서도 헌 룸메이트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무엇이 사랑인지 매일매일 묻고 하나의 질문을 덧붙인다. ..
6CM이던 시절도 있었지요. 룸메이트는 6CM 키의 엄지 왕자를 한시라도 잊지 않기 위해 비슷한 크기의 인형을 핸드폰에 달고 다녔답니다. 이랬었던 적도 있었지요. 아마 6개월쯤 되었을 때였을거에요. 그랬던 그가 정식으로 우리집에 입주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사진발 받습니다. 그는 말입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듣는 말이 있습니다. ""미남이시네요"" 꺄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전 잘생긴 남자에게 약한데. P.S 이 사진은 제가 어릴 적에 입던 베넷저고리입니다. 엄마가 간직해 주셨죠. 기념으로 이걸 입혀 보았습니다. 의외로 요즘 옷보다 편하더군요. 감촉도 좋고 말이죠. 그래서 아예 며칠 입혀 보았습니다. 제 눈에 안경인지는 모르겠지만, 천사같군요. 동의 안하는 분들은 절교하겠습니다. ^..
새로운 룸메이트가 11/11 입주했습니다. 실제 입주는 13일날 했습니다. 이제 룸메이트는 둘로 늘었습니다. 새로운 룸메이트를 위해 엄마가 와 있는 관계로 사실 룸메이트는 모두 3명입니다. 이 작은 룸메이트 때문에 저는 한숨도 잠을 잘 수가 없군요. 5시간만 full로 잠들면 좋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인터넷도 이제 겨우 하게 되었지만 30분 이상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텔레비전은 피곤해서 30분 이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가끔 책을 보기는 하지만, 역시 너무 피곤하군요. 신문은 며칠째 펼쳐보지도 않은 채 고대로 재활용 종이 더미로 처리됩니다. 뭐,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생각보다 아주 많이 힘들고 생각보다 아주 많이 즐겁습니다. 룸메이트를 들이는 작업이 감탄스럽거나 놀라운 일이기는 하였으나 황홀하거나, 행복..
베이비 위스퍼 카테고리 가정/생활 지은이 트레이시 호그 (세종서적, 2001년) 상세보기 소장형태: 영문판 소장 친구가(정확하게는 선배가) 이 책은 정말 좋은 육아책이라면서 책을 주었다. 사실, 아직 아기를 키워보지 않아 이 책이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을 나에게 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이 갖고 있는 마인드는 정말 훌륭하다는. 일일이 나열하기도 귀찮은 몇 권의 육아 관련 책들을 읽어 보았고, 대부분은 꽤 간단한 책들인데다가 아기 발달 책들은 심리학계에서 너무 많이 알려진 내용들을 간단하게 정리한 것들이 많아 건질게 없는 반면 이 책은 아직 부모가 되지 않은 두 남녀에게 충분히 부모가 될 만한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사회에서 부모, 특히 엄마에게 ..
아기는, 머리도 날 닮았으면 좋겠고, 얼굴도 날 닮았으면 좋겠고, 성격도 날 닮았으면 좋겠고, 술 못마시는 것도 날 닮았으면 좋겠다. 룸메이트에게 물어보니 룸메이트 왈 머리도 날 닮았으면 좋겠고, 얼굴도 날 닮았으면 좋겠단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인지 모르겠다만, 룸메에게 넘후 미안한 걸. ㅠㅜ 결론은, 나는 자뻑이고, 룸메는 관대하다는 것일까? 이러다가, 아기가 멍청하고 못생기면, 나 혼자 애를 키워야 할지 모른다. p.s 입체초음파를 안해서 모르겠다만, 아기의 얼굴은 아무래도 룸메이트를 닮은 것 같다. ^^;;;;;;
몇 달 뒤면 나의 새로운 룸메이트가 될 녀석을 위해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을 피아노로 치며 노래를 부르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이 곡이 추모곡이 되어 버렸다. 나의 두 번째 룸메이트가 음악을 하고 싶다고 하면 - 나는 내가 클래식을 했으니 피아노를 한다면 나는 정말 좋은 조력가 내지는 조언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니, 나의 첫 번째 룸메이트는 클래식보다는 대중음악을 하는 게 더 좋은데..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만약 정말 나의 두 번째 룸메이트가 음악을 하고 싶다고 한다면, 것도 대중음악을 하고 싶다고 한다면 적어도 마이클 잭슨 정도는 해야지, 마이클 잭슨, 마돈나, 너바나 정도는 해야지. 내가 요즘 미친 듯이 오프 스프링을 듣고 있지만, 가수를 하려면 마이클 잭슨 정도는 해야지, 라며 두 번째 룸메이..
사실, 임신은 여성의 독점적 권리이다. 현대 사회의 많은 여성들이 임신을 기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태아가 수정되는 그 순간을 제외한다면 임신은 철저하게 남성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독특한 여성들만의 경험이다. 많은 여성들이 임신을 기피하고 있는 이유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출산과 양육을 전적으로 떠맡으면서 사회의 소모적 존재로서의 역할, 즉 대체 가능한 하나의 인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부계사회나 모계사회를 불문하고 임신은 중요한 가치를, 그리고 임신 중의 여성은 독특한 지위와 권한을 부여받아 왔다. 이러한 임신 중의 여성에 대한 부계사회에서의 지위와 권한은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것인데, 이는 여성을 사회의 소모적 존재로 여기는 인식, 부계사회의 전통..
하루 종일 먹는 걱정만 한다. 어디를 나갈려고 해도, 내가 뭘 먹었는지,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부터 고민한다. 먹는게 지겹고, 먹는게 지겨워지니 사는 것도 지겨워진다. 그동안 얼마나 나는 끼니를 가볍게 때웠던가. 하루종일 먹는 걱정만 하는 나는 정말 케이지 안의 동물 같구나. 아침 먹고 나면 점심 걱정이고, 점심 먹고 좀 쉬고나면 저녁 먹어야 한다. 하루에 세끼를 먹어야 하는건 참으로 고역스러운 일이다. 룸메는, 내가 하루 3끼를 미친듯이! 간절하게! 챙겨 먹는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아침 11시에 밥 먹고 1시에 나가는건 당연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게 정상인거다. 그러나 11시에 밥 먹으면 나는 1시 30분에 다시 밥을 먹어야 한다. 먹는 일이 이토록 피곤한 일이었을까. 하루 ..
임신 소식은 하나의 해프닝 같았다. 약 3주 동안 음식 냄새는 커녕, 음식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집힐것 같았었는데 이제는 아주 피곤하거나, 공복이 아니면 꽤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가 되었다. 친구들에게 나의 소식은 어차피 하나의 해프닝으로 느껴질 것이고 뭐가 뭔지 사실, 바뀐 사실들은 없기 때문에 그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한참 바쁜 일은 어제로 끝이 났고 연애 상담으로 열을 올렸던 친구녀석은 이제 생활이 안정되어가고 있는지, 더 이상의 sos는 없고, 특별히 맡은 일도 이제는 없기 때문에 무료하고, 외로운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울렁거리는 일들이 줄어들면서 임신에 대한 자각이 줄어들었지만 대신 나는 이제 취직도 못하고, 박사 시험도 못보는 상황인지라, 놀랍고 신기한 경험의 일상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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