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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에 염증을 내지 않는 친구들을 거의 본 적이 없다만, 나의 엑스보이프렌드는 유독 직장생활을 힘들어했다. 워낙에 자유롭게 살려고 인생을 준비해 오던 사람이었으나 삶에 치여 직장을 다니게 된 경우여서 아마 유독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 친구는 입버릇처럼 자신은 "주부가 꿈"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집에서 요리하고 살림하면서 책을 읽는 일상을 보내고 싶다고, 내가 그렇게 살면 심심해지지 않을까, 야망 없이 살 수 있겠냐고 하면 날더러 니가 성장하는걸 보면, 니가 위대해지는 것에 자신이 헌신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며, 나에게 감동적인 모든 멘트는 ""내가 네 등에 날개를 달아줄게로"" 시작하곤 했었다.

내가 진짜로 똑똑(?)해서인지 -_-; 운도 좋고 복도 많아 인생에 좋은 남자들을 많이 만났는지, 날 꼬셔(?) 볼려고 기분좋게 던졌던 멘트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너의 성장을 통한 자기 만족""을 피력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여자(!)로서는 행운이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여성으로서 가지게 되는, 혹은 가질 수 밖에 없는 성차별의 피해의식보다는 남성도 가부장제의 희생자라는 회색주의자의 노선을 택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 똑똑한 여자들은 자신의 남자를 페미니스트로 만들듯, 좋은 남자들은 여자를 피해의식에서 벗어난 양성평등자들로 만든다. 
여고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 중 남자아이들이 꽤 많았던 나는 어쩌면 그 친구들을 통해 끊임없이 회색주의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훈련했고, 내 친구들 역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훈련헀을지도 모른다. 아마 이런 성향들이 여자가 남자보다 똑똑한게 어때서, 남자가 여자에게 희생하면 왜 안돼,, 등과 같은 가부장적 권위의식을 버린 남자들을 만나게 했을지도 모르고, 그런 남자들은 아마도 나를 더욱 회색주의자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순환하였다.
 
마초들의 강요와, 가부장적 위계서열에 고개 숙이는 것은 여성들만은 아니다. 남자들도 거기에 굴복하고, 짖밟히며, 결국 사회의 소모품으로 전락하게 되는 경제 생활에 그럴듯한 "자아실현"이나 사회적 "성공', 혹은 "야망"의 이름을 붙여 자신의 진짜 꿈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정도로 마비시키는 직장 생활에 찌드는 남자들이 얼마나 가여운가, 여자들은 남자들의 가부장적 등짐의 반을 짊어져야 하고, 남자들은 그 등짐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여성에게 강요하는 희생 역시 반절은 떠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20대 초반의 여자는 얼마나 인기가 좋았겠는가.

어쨌거나 그런 여자가 정말로 결혼해서 살게 되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너의 성장을 통한 만족""이나 ""너의 성장을 위한 나의 희생""을 피력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동반자적 성장""을 모토로 삼는 남자와 함께 살게 된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내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고등학교때 알게 된 어떤 한 오빠가 나에게 어떤 남자가 이상형이냐고 물은적이 있었다. 거기에 ""생각해 본적은 별로 없는데, 어떤 사람이든 good cook 이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었을 때 그 오빠는 엄청나게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었는데, 나랑 살고 있는 사람이 적어도 그런 대답에 웃음을 터뜨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뿐만 아니라 진짜로 good cook이라면 얼마나 행운인가. 
임신하고 집에 있으니 집안일의 90%는 내가 한다고 말을 하니- 투덜거림이 아니었다, 사실, 최근 이 구도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집안을 치우는 남자랑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집안의 질서가 어떻게 모두 내 마음대로 되겠는가. 돈은 그냥 내가 벌테니, 꼼꼼하게 돈관리, 세금관리 잘하는 남자 만나고 싶다는 소망과 good cook, 둘 모두를 가질 수 없다면 무엇을 택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선 들어왔던 검사나 돈 잘버는 의사들 중 하나를 잘 골라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벌이는 신경쓰지 않으면서, 일주일에 몇 번 정도 집안일을 하는 사람을 쓰면서 사는 것과,
남자가 한달에 몇 십만원밖에 벌지 못하는 것을 용인(?)하면서, 즉 남성의 가부장적 부담을 내려 놓도록 함과 동시에 나의 여성적 희생을 떠앉지 않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과연 어느것이 더 나의 과거의 피력과 현재까지의 철학에 정직하며 동시에 행복한 것인가.

전자의 결혼생활을 한다면, 나는 과연 남편이 전기 코드를 뽑지 않는 것을 용인할 수 있을까. 전자의 결혼생활을 한다면 전기 코드를 뽑아서 생기는 전기세 1만원의 차액이 아깝지 않을 수 있을까? 전자의 결혼생활을 하면 집안에 들어 앉아 스스로가 찌질해진다고 자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전자의 결혼생활을 하면 임신이라는 절대절명의 위기(?) 혹은 삶의 변화에 초연할 수 있을까. 전자의 결혼생활을 하면 독립된 하나의 인간으로서 거추장스러운 생활의 자질구레함들로부터 위협을 당하지 않으며 우아하고 멋지게 살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의사랑 결혼하였다고 해서 내가 로티나 아도르노를 읽는 시간과 손톱 손질을 받는 시간을 맞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돈이 많은 사람과 결혼했다고 해서 글쓰는 것과 골프치는 것을 바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아마도 손톱 손질도 받고, 아도르노도 읽고, 글도 쓰고, 명품 소파도 사겠지. 

그런데 결국 정답은 있다. 
나는 이제까지 마초가 아닌 검사는 보지 못했고, 제대로된 별명이 붙지 못한 의사들은 공돌이가 아닌 의사는 거의 보지 못했다. - 똑똑한 공대생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무식함을 상징하는 공돌이라는 별명은 사실 의사들에게 더 잘 어울린다. 공돌이들은 자신들이 똑똑하지 못하다는, 혹은 똑똑하지 못할 수 있다는 의식이라도 있지, 의사들은 그런 자각 조차도 없는 경우들이 너무 흔하다. 

물론 꼼꼼하고 세심하며 살림 잘하는 남자, 말 잘 통하고 나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는 남자와 결혼했다면 더 좋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남자에게는 전기 코드는 뽑지 않는 습관 같은 것이 없을 수 있을까? 

그렇다. 결국 정답은 있는 것이다. 






p.s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집안의 전기 코드를 뽑으며 돌아다니고 있으려다 보니 화재 현장 감식을 나온 것처럼 룸메이트의 지난밤 흔적을 쫒고 있는 기분이었다. 뭐, 같이 살다 보면 많은 일들이 룸메이트의 뒤치닥거리처럼 느껴지지만은, 룸메이트 역시 그런 기분 전혀 없이 나랑 살까.

왜 아침부터 룸메의 뒤치닥거리를 내가.. 단돈 만원에 내가 왜이런 스트레스를.. 왜 우리는 이리 가난해서.. 로 시작한 아침 불평은 결국 결혼생활에서 여성이 갖고 있는 구조적 문제와 피해,  나의 야망과 현재의 나의 삶은 어울리는가로 귀결했다가, 한 30분 지나니 삶의 태도라는 문제로 합리화되었다. 즉 답의 문제가 아니라 질문의 문제라는 것이다. 왜 나는 귀족적 삶을 살지 못하는가에 대해 질문하기 보다는, 지금의 삶은 무엇을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가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소한 문제는 사소하게, 큰 문제는 대범하게. 정답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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