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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이게 다 유전자 때문이라고
카테고리 과학
지은이 리사 시크라이스트 치우 (한얼미디어,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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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형태:  목동 학원 소장



그다지 건질게 많은 책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남았는데, 갖고 있는 책이 없어서 읽은 책. 내가 책을 읽는 속도가 빠른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2~3시간만에 다 읽었으니 아마 속도가 좀 빠른 사람이면, 혹은 관련 주제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라면 아마 2시간이 채 안걸릴 것이다. 

유전자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참 많지만, 혈우병 이야기만한 것이 없지 싶다.
왜냐하면 혈우병은 반성유전이기 때문에 어느쪽에서 유전되었는지 명확하고 미국에서만 일년에 400명이 태어날 정도 - 적당한 데이타 베이스를 유지할 만큼의 많은, 혹은 신비주의를 유지할만한 적은 환자를 유지하는 수에, 누구나 다 아는 병이지만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그러나 곧 정복될 것 같은 병이기 때문이다.

혈우병은 사실 치료되지 않는 병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가 되기 전에는  전체를 수혈받는 방법이 사용되었고, 1990년대가 되어서야 혈액 응고인자가 개발되어 1999년이 되어야 상용화가 되었다.

혈우병은 여타 다른 병과는 달리 계보도를 그려볼 수 있기에 사실 흥미를 더한다. 이와 관련하여 책의 부분의 발췌해 본다.




p. 118

1853년 혈우병을 지니고 태어난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 레오폴드 왕자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유럽 왕실에서 흔히 나타났던 포르피린증 같은 다른 유전질환과 달리 빅토리아 여왕을 괴롭힌 질병은 그때까지 한 번도 발현된 적이 없는 혈우병이었다. 레오폴드 왕자의 X염색체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가 혈우병이 아니었더라도 빅토리아 여왕은 혈우병 보인자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가 혈우병 보인자였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추측이기는 하지만 한 가지 그럴듯한 가설은 p. 119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와 그의 나이에 대한 가설이다. 빅토리아 여왕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인 에드워드 켄트 공작의 나이는 마흔두 살이었다. 다운 증후군같은 유전질환은 어머니의 나이 때문에 발현하기 때문에 보통 산모에게 주목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이든 아버지의 정자가 돌연변이를 일으킬 확률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따라서 빅토리아 여왕의 응고인자 8번의 결함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X염색체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전자의 근원이 누구였는지는 모르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딸인 베아트리체 공주와 앨리스 공주의 혈우병 인자는 결혼을 통해 유럽 왕실로 퍼져갔다. 독일 헤센의 헨리 왕자와 결혼한 베아트리체 공주는 혈우병에 걸린 왕자 두 명과 혈우병에 걸리지 않은 왕자 한 명 그리고 보인자인 공주를 낳았다. 베아트리체 공주의 딸 유지니는 스페인의 알폰소 왕가 결혼하여 스페인 왕실에 혈우병 유전자를 전해주었다.

헤센 공작 로우이스와 결혼한 알리체 공주는 여섯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에 한 명은 혈우병을 앓은 왕자였고 두 명은 혈우병 인자를 보유한 보인자 공주였고 나머지 세 명은 혈우병 인자가 없는 공주들이었다. 그 가운데 프러시아의 헨리 왕자와 결혼한 이레네 공주가 프러시아 왕가에 혈우병 인자를 전해주었다. 비극적인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가에 혈우병 유전자를 전해준 사람은 알리체 공주의 딸 알릭스 공주였다. 1894년 11월 26일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와 결혼한 알릭스 공주는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비가 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었다. 프랑스 왕녀와 결혼하여 정p.120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를 원했던 부친의 뜻을 거스르고 니콜라이 2세는 알릭스 공주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올가, 타티아나, 마리에, 아나스타샤라는 네 명의 공주를 낳은 후, 1904년이 되어서야 그토록 고대하던 왕자 알렉세이를 낳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알렉세이 왕자는 혈우병을 앓고 있다.

왕자의 병 때무에 충격을 받은 알렉산드라 황비는 왕자의 끔찍한 출혈을 고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다. 알렉산드라 황비는 시벨아에 치료 능력이 있다는 신비술사 그리고리 에피모비치 라스푸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908년 알렉세이 왕자의 출혈이 멎질 않자 황실은 라스푸틴을 궁전으로 불러왔다. 라스푸틴은 왕자를 진정시키고 출혈을 멈추게 했다. 라스푸틴이 어떤 방법으로 왕자의 출혈을 멈추게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최면술과 약물 치료로 출혈을 멈추게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찌되었건 라스푸틴은 계속해서 알렉세이 왕자의 출혈을 치료했으며 그러는 동안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알렉산드라 황비가 신임한 신비술사는 성스러움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방탕한 라스푸틴은 온통 악한 일만 일삼았다. 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했던 라스푸틴은 매춘부와 어울리는 일이 자주 있었으며 정부도 여럿 두었다. 라스푸틴의 행동은 러시아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1896년 리콜라이 황제와 알렉산드라 황비의 대관식 축제 때 발발한 폭동을 시작으로 니콜라이 황제 재임 시 러시아에서는 무시무시한 소요 사태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재임 기간 내내 니콜라이 황p.121제는 파업과 폭동이 시달려야 했다. 1904년부터 1905년까지 지속된 러일전쟁 때문에 일어난 육군과 해군의 발란으로 니콜라이 황제는 제정 러시아 국회인 두마를 설립할 수밖에 없었다. 1914년 러시아의 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니콜라이 황제는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러시아를 떠나야 했다.

황제가 부재중인 가운데 알렉산드라 황비가 국정 수행 임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의 권력은 라스푸틴의 손으로 넘어갔다. 라스푸틴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관료들을 모두 해임하고 자신의 측근으로 정부 인사를 채웠다. 국가가 외국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국정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자 혁명의 TKr이 트기 시작했다. 1916년 제정주의자들은 라스푸틴 때문에 황실과 국가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그를 암살했지만, 이미 로마노프 왕조를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17년 3월 8일 결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니콜라이 황제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황제가 파견할 정부군은 패하고 마았고, 황제는 동생인 미하일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황제의 동생 미하일 왕자는 왕이 되기를 거부했고 결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궁전에 유배되어 있던 황제의 가족은 시베리아로 이송됐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볼셰비키 혁명의 주인공들은 1917년 11월, 황제 일가를 예카테린부르크로 이송했으며 1918년 7월 그곳에서 황제 일가를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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