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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에서 거닐다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지은이 이택광 (아트북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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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형태: 학교 도서관


장: 중세의 코드를 바로크 시대까지 확장 적용하여 쓴 가볍고 즐거우나 써야할 내용은 거의 언급한 성실한 책.

단: 원래 내가 책을 80%정도 읽으면 종종 책을 지루해 하기는 하나.... 빤한 결론이 나오기까지를 잘 견디지 못하는 편인건지, 인내심이 부족한 것인지.. 80%에 이르자 이 책이 견딜 수 없어졌다.
중세의 코드 확장에 완전히 무리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듯.








p. 51

원래 Bosch라는 이름은 보스가 자신의 그림에 서명으로 남긴 것이고 본명은 제롬 판 아에컨Jerome van Aeken이다. 여기에서 제롬을 Jheronimus라고 쓰기도 한다. 이렇게 철자가 제각각인 건, 당시에 음성이 글자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해서 철자법이 제대로 정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p. 64

어쨌든 필자가 보기에 지옥의 발명은 서양 문화에서 철학의 발명만큼이나 중요한 문화적 사건이다. 천국과 지옥을 나누고 최후의 심판을 통해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분해서 선한 자는 천국에 가고 악한 자는 지옥에 간다는 새로운 인식이 등장함으로써 기독교는 사랑과 화해의 p. 65 종교에서 권위와 통치의 이데올로기로 변화했던 것이다. 예수가 죄를 대속했기에 원조가 없어졌다는 인식이 사라지고 자신들의 메시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인간의 어리석음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죽은 자의 육신은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혼만은 하늘로 올라가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생각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문화적 사건으로서 천국과 지옥의 구분은 많은 새로운 문제점들을 발현시켰다. 항상 하나의 문이 열리면 다른 하나의 문이 닫히는 법이다.

그 문제점들 중의 하나가 태어나자마자 죽은 영아의 영혼 문제였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영아는 세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영생의 약속을 받을 수 없다. 그럼에도 영아는 가장 순수한 인간이기 때문에 죗값이 어른들보다 덜한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교회는 또 머리를 짜내야 했다. 영아는 죄를 지을 새도 없이 죽었으니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영아도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세례를 받을 짬도 없었으니 이 원죄를 씻을 기회도 없었다. 당연히 세례를 받지 않았으니 이교도이고 이교도는 지옥행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결정은 원래 사랑을 기조로 하는 기독교 윤리로 본다면 너무 가혹했다. 그래서 중세인은 ‘연옥’과 ‘림부스’란 걸 발명해야 했다. 여기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아리에스의 동료이기도 했던 자크 르 고프가 쓴 [연옥의 탄생]이란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연옥이란 공간은 천국과 지옥 중간에 있으며 가벼운 죄를 지은 죄인들이 머물려 속죄의 과정을 거친 후 천국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곳이다. 그리고 림부스는 세례를 받지 못한 영아의 영혼들이 머무는 곳이다.

 

p. 148

유명론이 자연과 인간의 언어를 분리시켜, 인간의 언어가 독자적인 상징체계에 불과하다는 걸 주장했다면, 단테의 시학은 그 언어가 독자적일 뿐만 아니라, 자연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었다. 언어는 이제 문화라는 제2의 자연을 위한 전제조건 같은 게 되었다. 이런 논리는 자연스럽게 언어가 경험과 정신을 매개하는 지위를 갖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언어의 조탁이 이런 매개 작용을 더욱 정확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미학 관념을 등장시켰다. 드디어 예술이 하나의 독자 영역을 획득하는 순간이었다.

 

p. 174

예수의 성 테레사Saint teresa of jesus라고도 불리는 성 테레사Saint Teresa of Ávila의 본명은 테레사 데 세페다 이 아우마다----dlek. 1515년 3월 28일 에스파냐 아빌라에서 태어나서 1582년 10월 4일 알바데토르메스에서 사망했고 1622년 성녀로 추증했다.

성 테레사는 로마 가톨릭을 대표하는 신비주의자 중 한 명으로서 신앙 서적을 쓰고, 금욕과 명상을 덕목으로 삼는 원시 카르멜회의 계율을 강조하면서 카르멜회 개혁을 주도한 인물이다. 1529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빌라에 있는 카르멜회 강생수녀원에 들어간 테레사틑, 그러나 2년이 채 못되어 건강을 잃고 3년 동안 병상에서 무력한 삶을 살았다. 이 덕분에 테레사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건강을 되찾게 되자 이런 생활도 시들해졌다. 그 뒤 15년 동안 테레사는 세속과 신앙 사이를 방황하다가 1555년에야 마침내 신앙에 눈을 떴다.

그 후 테레사는 1558년에 해이해진 카르멜회 수도원 생활을 원래p. 175의 상태로 돌려놓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이런 과정을 자신의 신앙서에 쓰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테레사와 그의 동지들은 철저한 은둔 생활을 하며 신의 율법을 명상하고 고행의 기도 생활을 수행하면서 인류의 죄를 보상하기 위한 사명을 실천했다. 그녀는 1562년 교황 피우스 4세의 승인을 받아 ‘성 요셉 수녀원’이라는 이름의 최초의 카르멜회 개혁 수녀원을 열었다. 이 수녀회는 기부금을 받지 않고 운영하는 등의 몇몇 이유로 세속 관리와 성직자들에게 심한 반발을 샀으나, 오직 대중이 제공하는 구호품만 가지고 사는 청빈한 생활을 엄격히 고집했다.

테레사는 몸이 허약한데다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에스파냐 전역에 16개 이상의 수녀원을 세우고 돌보면서 여새을 보냈다. 1575년 세비아 수도원에 있을 때 ‘맨발의 카르멜회’로 불렸던 ‘원시 규율파’ 탁발수사들과 ‘신발을 p. 179신은 카르멜회’라고도 불렸던 ‘온건 규율파’ 수사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테레사는 이러한 분쟁을 예견하고 막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급기야 카르멜회 총장의 오해까지 사서 카스티야에 있는 수텨원에 은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후 1579년 테레사를 이해하고 존경한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의 노력으로 테레사는 구금에서 풀려나서 ‘원시 규율파’의 독립 영역을 할당받을 수 있었다. 테레사는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개혁사역을 다시 시작하라는 지시를 받고 모든 노력을 The아부으면서 일하다가 부르고스의 아빌라로 가는 도중 세상을 떠났다.

 

 

p. 192

티치아노와 치마 다 코넬리아노의 그림이 보여주는 예수의 몸은 즐기는 대상으로서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매개이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그 새로운 몸의 도래를 예언하는 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런 세속적 육체가 공동체적 육체로 바뀐 사건이 예수의 부활이다. 마리아가 사사로이 예수를 붙잡거나 만질 수 없었던 까닭이다. 바야흐로 근대 공공성의 개념이 여기에서 싹을 틔우고 있는 것이다.

카라바조 그림에 등장하는 요리사의 표정이야말로, 새로운 주체의 공간을 만들어낸 바로크의 뒤틀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지만 즐길 수 있는 대상으로 예수의 부활을 보는 태도, 바로 여기에 근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바야흐로 종교의 신앙으로 인해 가능했던 결여 없는 상상의 스크린은 그 바깥에서 이 결여를 적극적으로 느끼는 카라바조의 ‘요리사’ 같은 존재의 출현 앞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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