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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an's story

경험 이전의 경험

지.리 2009. 4. 6. 00:27


1. 엄마는 늘 자식을 가진 사람은 남에게 함부로 하지 못한다고 말하곤 했다.
못되보이는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자식이라고, 늘 나에게 말씀해 주셨다.





2. 요즘 나의 고민은 인간의 언어 구조는 어떻게 습득되는가,이다. 인간의 사고 구조는 언어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가
아니면 사고 구조는 언어 구조를 통해 체계화 되는 것인가?

아기들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러니까 세상을 접하기 전부터 언어의 구조는 접한다.
청각이 생기기 전부터 진동을 느끼고, 청각이 생기고 난 이후에도 말은 그저 소리라는 진동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들은 그 언어의 구조에 익숙해지게 된다.
말 그대로 그 언어가 낯설지 않게 된다.



그러면
감정은 어떠한가?
사실 태아는 엄마의 감정을 통해 감정을 학습한다.
말 그대로 체화된 인지로서의 감정을 학습하게 된다.
이것이 유전자에 박혀 있는 선험적인 것이든,
뱃속에서 세상을 접하기 전의 ""경험 이전의 경험""이든
어쨌거나 감정은 세상을 접하기 이전에 가장 확실하게 학습될 수 있는 항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정은 어느정도 선험적으로 결정되고 어느 선에서부터 학습되는 것일까.


3. 그렇다.
이 모든 생각이 시작된 것은 내가 임신했기 때문이다.

매우 담담했으나,
친구들이 기분과 내 상태에 대한 질문과
그리고 약간의 감동의 눈믈을 흘리는 것을 보고
실감하기 시작했으며

초음파로 심장이 뛰는 모습을 아주 허술하기 짝이 없는 언어들로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포옹과 눈물과 감탄을 보고,
내가 그리 나쁘지 않게 살았음을 깨닫고, 오히려 그것이 더 기뻤으며
그래서 친구들에게 고마웠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의
대부와, 대모가 생겼다.




4. 임신을 하고 보니 남자와 잠을 자는 일이 보통이 아니라고 깨닫다.
예전에 친구가 여자친구랑 정말, 정말, 정말로 딱 한번 했는데 임신을 했다면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나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당연히 임신 경험이 없었던 나로서는 별다른 조언을 해 줄 수는 없어,
뭐 그럴 수도 있지,로 일관했지만.

근데, 임신을 하고보니 정말로 정말, 정말, 정말 딱 한번만에도 충분히 임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고보니 무모하게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으면서
남자와 여자가 자고, 여자와 남자가 대책을 세우지 않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겁나는 일인지.

언제나 섹스는 성스럽고 거룩한 일이라고만 배웠는데
그따위 엄숙주의 21세기는 커녕 20세기에도 어울리지 않지.
그런데, 그것이 성스럽고 거룩하지는 않아도
정말 대책없이, 상대에 대한 확신도 없으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이제와서 깨닫게 된다.

임신을 하니,
나와 법적으로 결혼한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는게,

결혼하고 싶지 않은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은 게,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여전히 예전 어떤 생일날 시누이에게 받은 아기 신발 선물은
이제 아기를 임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썩 유쾌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축하받을 수 있는 상황인 것이 다행이고, 기쁘다.


5.
사실 임신은 여러가지를 증명해 주는 수단으로도 활용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엄청나게 건강하고, 그동안 매우 바르게 살았다는 것이
임신과 몇 가지의 검사로서 드러났다.

삶이
몸에도 기록된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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