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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학의 방향
김문환 편저
열화당 미술선집 48
1985





p. 92

미적 경험은 그것이 아무리 여러 요소들의 복합이라 할지라도, 보통 하나의 형식에 의해 지배된다. 작곡에 있어서 ‘지도동기’(Leitmotiv)가 그 대표적인 예로 손꼽힌다. 나아가 하나의 예술작품은 우리들의 경험에서 만나는 다른 어떤 대상보다도 훨씬 더 고립적인 전체라는 점을 그는 내세운다. 그림의 경우, 그림을 주변세계로부터 구분하는 틀 역시 이러한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러 개의 요소적 형식들의 결합방식(mode of combining)은 그 나름대로 세련된 실험적 조사들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아마도 미적인 즐거움을 주는 형식들은 복잡한 전체 속에 결합될 경우에라도 ‘미적 중심’으로서의 가치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다. 지각하는 주체들 속에서의 재능 및 재질의 다양성이 그 결과들을 손상할 것이라는 반대에 대해서도 페히너는 별로 괘념하지 않는다. 그러한 차이들은 실험과 통제에 의해서 시험될 것이고, 이러한 절차를 수단으로 삼아 불가피한 편차들이 종국에는 어떤 평균치를 산출해낼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논란의 대상이 되는 주요한 난점이 단순한 요소들의 결합들에 대한 언급으로써 해소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페히너 자신도 인정하듯이 미적 대상에는 표현과 의미같은 전적으로 다른 기원과 성격의 구성요소들이 존재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단순히 어떤 형태로 결합된 노랑색, 금색, 초록색의 단편들의 복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컨대 레몬을 본다는 주장에는 그러한 함의가 숨겨져 있다. 말하자면, 일차적인 인상들은 의미의 담지자이다. 나아가 이러한 특수한 과일과 결합된 내포들, 예컨대 그 냄새와 생산국에 힘입어 어떤 표현이 시각적인 형상 속에 구체화될 수도 있다. 레몬은 눈부시게 푸른 하늘, 검은 나뭇잎, 이탈리아 풍경의 매력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페히너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정신적 색채’를 지니고 있다. 칸트로 하여금 고심케 하고 드디어는 자유미와 부속미를 구별케 만든 오래된 난관이 여기 바로 실험미학의 본거지 속에서도 재등장한다.

 

 

p. 94

 

감정이입(Einfühlung: empathy)이란 인간의 감정, 정서 그리고 태도를 무기물 속에 투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적인 술어인 ‘감정이입’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로베르트 피셔(Robert Vischer)이다. 그가 1873년에 쓴 『시각적 형식감정: 미학에의 한 기여 Über das optishe Formgefühl: Ein Beitrang zur Ästhetik』가 그 효시로서 이 글은 1927년에 출판된 『미적인 형식문제에 관한 세 논문집 Drei Schriften zum ästhetischen Formenproblem』에 재록되었다. 그의 제안들은 독일에서는 테오도르 립스(Theodor Lipps), 요하네스 폴켈트(Johannes Volkelt), 그리고 칼 그로오스(Karl Groos)에 의해 프랑스에서는 빅토르 바쉬(Victor Baxch), 영국에서는 버논 리(Vernon Lee)에 의해 채택되고 발전되었다. 이 현상은 물론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우리는 격노하는 파도니, 우울한 저녁 하늘이니 하는 표현을 곧잘 쓴다. 뿐만 아니라 신화와 종교적 상징, 사회적인 관계 전체가 이와 같은 형상과 직접․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다. 18세기 영국에서 케임즈경(Lord Kames)이나 특히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윤리학과 연관해서 거론한 동정(sympathy)이론도 이 감정이입 이론의 성립에 큰 계기가 되었다. 이 이론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립스가 흄을 독일에 처음 소개한 것이라든지 하는 외적인 사실도 지적될 수 있지만, 감정이입이론은 이미 흄의 미학 이론에서 그 싹을 보인다. 빅토르 바쉬는 실제로 ‘감정이입’이라는 말을 ‘동정적 상징주의’ 또는 ‘상징적 동정심’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였다.

감정이입 심리학자들의 주장의 저변에는 어떤 암묵적인 전제가 존재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경험이란 인간에게는 본개 낯선 사실들과 대상들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따라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감춰진 심적 기제(mechanism)라는 가정이 요청되었고 이러한 가정적 행동이 곧 감정이입이라고 불리었던 것이다. 하나의 정서적 상태가 어떤 대상 속에 주입되고 그 대상과 병합되어 그것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주조해낸다. 이 모든 것이 무의식 속에서 진행된다. 외적인 사물에 대해 행해진 이러한 부채를 알지 못한 채, 의식적인 자아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현시와 대면한다. 우리는 사물들이 우리 자신의 언어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발견하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우리 자신의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반면에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게 된 이후에도 대상 속에서의 반응력은 지속된다. 예술이란, 환상이 깨어진 세계 속에서 지속되는 환상이다.

 

p. 97

 

동물들과 인간을 묶는 취미의 공통성에 관한 다윈의 암시는 같은 영국인 그랜트 알랜(Grant Allen)과 그 밖의 사람들에 의해 채택되어 하나의 발생이론으로 발전되었다. 그들은 예술을 동물적인 본성 속에 깊이 뿌리내린 가장 고상한 본능의 표현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 속에서 앞에서 언급한 허버트 스펜서가 등장한다. 다윈과 마찬가지로 스펜서는 예술에 대한 설명을 예술 자체 안에서 찾지 않고 보다 큰 맥락 속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보다 포괄적인 현실은 그에게 있어서 단순한 동물적 본성으로서가 아니라 자연과 사회의 혼성체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의 이론에는 말하자면 생리학과 사회학이 상호 침투되어 있는 셈이다. 그 자신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독일인이라고 했지만, 그는 쉴러에게서 빌어온 것이 분명한 놀이개념을 자신의 경험과학적인 예술이론 속에 도입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자연과 인간 사회의 거대한 유기체들 속에서 각각의 기능적인 부분과 각각의 구조적인 특성은 그 특유의 유용성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의 모든 신체능력들과 정신능력들, 본능과 욕망은 물론 최고의 감정들까지도 개체 또는 종족의 유지․보존을 거든다. 이러한 규칙으로부터 예외적인 두 가지 활동이 존재하는데, 양자는 필요의 지배로부터 제외된다는 바로 그 점에서 상통한다. 예술과 놀이가 바로 그것이다. 예술과 놀이가 육체나 정신능력 향상에 어떤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은 말하자면, 생활의 사치인 셈이다. 그의 생존과 관계되는 진지한 업무들에 종사하는 것으로부터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개인은 그의 정력들의 풍요성을 향유하는 것을 허락받는다. 이같은 유형의 불필요한 정력의 운용을 표시하는 일반적인 어휘로서 스펜서는 ‘놀이’라는 용어를 선택하였고, 이로써 예술은 일종의 놀이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스펜서의 이론은 그 일방성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이른바 철학의 몰락 내지 과학에의 맹신에 의해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그의 모범적인 제자 그랜트 알렌은 이를 더욱 체계화하여 “미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최소한의 노력 또는 낭비로 최대한의 자극을 제공해주는 것이다”라는 ‘경제원리’를 주창하기에 이른다. 이 ‘놀이’이론은 이 밖에도 많은 사상가들 내지 과학자들을 자극하여 각가지 변종을 낳았으니, 그 중에서 우리는 『동물의 놀이 Die Spiele Der tier』(1898)와 『인간의 놀이 Die Spiele Der Menschen』를 쓴 독일인 칼 그로오스(Karl Groos)와 우리말로도 번역 소개된 『호모루덴스 Homo Rudens』즉 ‘놀이인간’을 쓴 네덜란드 역사학자 호이징하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콘라드 랑게(Konrad Lange)는 놀이 이론을 예술심리학으로까지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예술향수의 핵으로서의 의식적인 자기기만 Die Bewuβte Selbsttäuschung 민 Kers des Künstlerischen Genuβes』(1895), 『예술의 본질 Das Wesen der Kunst』(1901)이라는 저서들을 통해, 놀이는 예술의 진정한 핵이며 미적 향수의 참된 원천이라고 하는 주장을 계승하면서, 나아가 그것이 자의적이고 의식적인 자기기만이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환멸을 목표로 한 반대경향과 환상을 유지하고자 하는 성향 사이의 동요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어린이의 놀이를 관찰하면 우리는 성인의 미적 향수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림책을 보고 있는 어린이는 회화라는 예술활동의 이념을 예감케 하며 조각은 인형놀이의 세련된 형식이라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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