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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터스텔라는 불행하게도 과학 영화는 아니었다. 대중 영화에 내가 도대체 뭘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루고 있는 과학적 이론을 픽션화 한 것 치고는 무척이나 얕은 수준이었고, 그저 일반 상대성 이론에 큰 무리 없는 수준의 영화었다. 사실 그 점 때문에 무척이나 아쉬웠고, 슬프고, 우울하기까지 했다. 나는 더 많은 것을 원한다.
2.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린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나 역시 내 방 벽에는 유리 가가린, 닐 암스트롱,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사진이 걸려 있었고, 어디에서 나온 사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지구를 배경으로 우주 유영을 하고 있는 우주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어린 시절의 우주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 때는 모든 아이들의 꿈이 물리학자이거나 우주비행사, 천문학자 같은 것이었던 시절이었다. 여기에는 남자는 물리와 수학, 여자는 어문학이라는 이상한 도식에 사로잡혀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으레껏 존재하기 마련이었고, 여기에 반발하여 수학과 물리를 미친듯이 공부하던 나 같은 여자아이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그 반항심 이상으로 나는 물리를 좋아하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물리학 그 자체라기 보다는 특정한 몇몇 이론들을 공부하게 되고, 어쩌면 그보다도 더 과학사를 더 좋아하게 된지도 모른다. 정말 순수한 잉여력 돋는 공부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재미있는 공부이다. 그래서 제발 과학과 인문학이 연결되어 있는 (거기에 미술이 포함되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그 무언가를 제안했을 때 한국 시장에서 가장 안먹히는 코드, 출판했을 때 별 재미를 못볼 책이라는 반응들이 가장 슬펐고, 여전히 슬프다. 내가 뭘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터스텔라에 대한 실망은 이런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3.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예상했던 것처럼 실망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운 영화였고 무척이나 좋았다. 거대한 이야기를 거대하게 끝내는 방식은 더할 나위 없었다. 거대한 이야기, 인류와 지구, 과학 이론 혹은 그 다른 이름으로서의 종교, 인류와 지구의 종말, 혹은 한 사회의 흥망성쇄나 역사적 통찰을 다루는 이야기들이 자칫 사적인 주제들로 소급되어 시시해져 버리는 과오는 너무 흔하다. 예를 들어 올해 보았던 영화 중 가장 최악의 영화로 꼽는 "어바웃 타임"은 그 영화적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한 인간과 세대를 걸친 운명과 그 운명의 역사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의 운명마저도 그저 방관적으로 소비해버리는, '오늘을 즐겨라. 그것은 어제 죽은 사람의 가장 바라던 날이었다'같은 뻔한 클리쉐를 남발하는 일을 저질렀다. 그것도 가장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힐링'과 '아픈 청춘'을 남발하는 대한민국에서, 즉 개인의 고통마저 소비하는 방식으로 전락한 극도의, 그것도 가장 천박한 방식의 자본주의와 같은 방식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개인의 고뇌가 집단과 공동체와 역사에 동참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고뇌라고도 할 수 없지 않은가.
4. 그러나 인터스텔라는 궁극적으로 "인류가 멸망할 수 있는 그 마지막 순간마저 사랑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어떤 사회담론적인 시각으로서 던지므로서 적어도 개인의 문제로 소급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지구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 명제와 어떻게 다른가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즉 사랑이라는 감정의 효용성과 그 사회적 역할에 대해 질문한 영화는 그리 흔하지 않다. 영화 중간에 감정 이론에 대한 대사가 등장하는 것, 만 박사가 "로봇을 보내지 않은 이유가 뭔지 알아? 그것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기 때문이지"라고 말하는 대목은 그 연결성을 더욱 명확하게 해 준다. 설명하자면 공포라는 감정은 대상에 대해 비명확성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로봇에게 프로그램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비이성적인 항목이기 때문이다. 대상이 명확하지 않고, 범주가 넓은 것은 이성주의로서는 포괄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며 그렇기 떄문에 공식화 할 수 없다. 그러나 생존에 관해서라면 공포라는 감정은 더 넓은 범주를 가지면 가질 수록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더 잘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은 특정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잘 살아남게는 해 준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랑은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아멜리아가 그저 머리보다는 가슴을 따라가고 싶다고 이야기 할 때 영화는 이 마지막 순간 "우리는 사랑해야 해"라는 당위가 아니라 위기와 죽음 앞에서 사랑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 것인가, 우리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멈추어지지 않는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때로는 무모한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이 사랑은 개인과 인류와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간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질문하게 한다. 게다가 영화 중간에 보면 누스바움의 이름이 등장한다. 감정이론학자에 대한 오마주다. (언뜻 검색해보았는데 한국은 물론 외국도 누스바움에 대한 언급이 없더라. 아마 평소때 같았으면 누가 후딱 배껴 쓸까봐 겁내하는 좀팽이스러운 마인드로 이런 발견은 술자리 안주 용으로 쓰거나 아니면 공식적인 내 글에만 쓰겠으나, 오늘은 어차피 누스바움은 아는 사람 몇 없다는 거만함으로 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우울하다. 별거 없는 애들이 꼭 이러는걸 나도 알기 떄문이다.)
사실 인터스텔라는 영화의 주제상 과학 이론보다도 감정 이론에 더 힘을 실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감정이 이론을 대중적인 차원에서 풀어쓰다보니 썩 이론적이지 않아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 역시 큰 무리는 없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범인류적인 사랑이 가능한 사람은 결국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는 줄 아는 사람, 누군가를 진심으로, 뼈아프게 사랑해 본 사람만이 그 사랑을 범인류적인 인도주의로 확대 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 자체가 문제 될 것은 없으나 이것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가족을 가져 보지 못한 사람과 대비하는 것은, 그래서 가족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은 더욱 이기적이라는 대비를 통해 그러한 설득을 이루어 냈다는 것은 다소 마음이 아팠다. 결국 우리는 그토록 스티븐 스필버그를 사랑하면서도 그토록 그에게 짜증을 냈었던 것은 그가 가족주의를 너무 지나치게 설득하려 하였기 떄문이지 않았던가. (사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이 좋았고, 지금도 좋아하기는 한다.)
5. 돌이켜보니 뱉맨 시리즈를 제외한다면 놀란은 계속해서 시간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글을 쓰다보니 나는 인터스텔라에서 인셉션과 같은 충격을 기대했었던 것 같다. 인셉션 역시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만의 어떤 철학을 기대했었지만 그 깊이는 아주 얕았고, 거론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 영화가 너무나 훌륭했었떤 것은 모든 물리학적 실험과 영상 실험의 총체였다는 것이었다. 테이크를 길게 조절하면서 시간과 시간 사이,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그 사이의 공간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스토리를 만들었다는 것이 아름다웠다. 인터스텔라는 그와 비슷하 것을 추구하기는 하였으나 인셉션만큼 형식과 내용의 부드러운 도킹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늘 놀란의 영화중 인섬니아를 가장 좋아했는데 전통적인 방식의 클로즈업과 시간 늘리기와 같은 기법 그 자체가 주인공이었던 알파치노의 심리와 동일시 되었기 때문이었다. 영상은 마치 싯구를 옮겨 놓은 듯 화면에서 문학적 문장과 단어들이 뚝뚝 떨어지는 영화였다. 인스텔라가 어쩌든저쩌은 중요한 것은, 놀란은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을 만들어내는 몇 안되는 영상작가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거면 사실 충분하다.
6. 시간에 대하여.
어릴 때 슬프게 읽었던 그 동화는 이렇게 끝이 난다. 그는 더 이상 웬디를 찾아오지 않았다. 웬디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 그러나 웬디는 자신이 할머니가 되었을 때 그가 웬디의 손녀에게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가 된 웬디는 여전히 소년인 그의 이름을 불렀다. 피터팬,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웬디는 자신의 손녀와 피터팬이 창문을 넘어 저 멀리 네버랜드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저 동화는 정말로 저렇게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모르고 있지만 이미 많은 것들을 알고 있기도 하다.
7.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늘 거북이와 하루살이가 떠오른다. 물론 빛의 속도에 가깝게 여행하는 것 따위와는 관계 없는 그저 지구의 법칙이지만, 하루살이의 하루는 그에게 60년일지도 모른다. 하루살이가 보았을 때 인간은, 인간이 거북이를 보고 있는 것과 같이 느릴 것이다. 반면 거북이에게 100년은 10년 정도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보기에 인간은 , 인간이 하루살이를 보는 것처럼 너무나 빨리 움직이고 있어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채기도 힘들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왜 슬퍼지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인터스텔라는 너무 슬픈 영화였다. 영화 보는 내내 꺼이꺼이 울었다. 내가 봤던 토성의 고리 중 인터스텔라의 것이 가장 슬펐다. 정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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