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칸트와 도덕

선함을 찾는 인간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

김채린

 

격월간지 책나무 3/4월호

 

 

 

 

 

무엇이 옳은 행동인가?

도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드나요? 어떤 사람들은 고리타분하게 들릴지도 모르겠고, 어떤 사람들은 무관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고요. 어쩌면 도덕이란 우리에게 이런 느낌으로 곁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의견을 제시하거나 어떤 행동을 결정해야 할 때, 아마도 그 의견과 행동의 기준은 옳음이 될 것입니다. 무언가가 옳다는 것은 아마도 도덕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일 테고요. 보통의 경우 이런 도덕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지 말아야 한다든가,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한다든가. 이런 도덕들은 우리에게 큰 고민을 안겨주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물어봐도 쉽게 대답할 수 있지요. 그것은 나쁜 짓이니까 하면 안 돼. 이렇게 말이지요.

그런데 정말 살인 같은 것들도 언제나 나쁘기만 한 것일까요? 만약 아니라면 어떤 살인은 옳고, 어떤 살인은 그른가요? 그럼 이런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지요. 자신의 집에 들어와 해를 끼치려고 하는 강도에 맞서 싸우다가 그 강도를 죽인 여자는 나쁜 짓을 한 것일까요? 만약 아니라고 아내를 구하려다가 강도를 죽인 남편의 경우라면 어떤가요? 강도는 남편을 전혀 해치려고 하지도 않았다면요. 이것도 나쁜 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경우는요? 결국 강도는 여자를 죽였고, 경찰은 그 강도를 놓쳤습니다. 남편은 몇 년 동안 그 강도를 찾아 헤매다 끝끝내 찾아 강도를 죽였다면요? 그 남편은 나쁜 짓을 한 것일까요, 옳은 일을 한 것일까요? 그러면 자신과는 무관한 연쇄 살인범을 죽이는 경우는 어떨까요? 물론 이 연쇄 살인은 경찰이 해결하지 못한 사건입니다. 그 연쇄 살인범을 죽이지 않았으면 그는 더 많은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면 연쇄살인범을 죽인 것은 잘한 건가요?

 

사람마다 모두 다른 선의 기준

그런데 연쇄살인범을 죽여도 된다/안된다를 결정하기 전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판단을 내린 사람들 모두 나름대로의 도덕적 기준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 나름의 입장에서는 모두 도덕적으로 수긍이 갈 수 있습니다. 일상적이고 모호한 경우라면 아마 더 그렇겠지요. 이럴 때 우리가 쉽게 취하는 입장은 너도 옳고, 나도 옳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닐 것입니다. 세상은 너무나 복잡해서 한 가지 기준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니까요.

이런 입장을 상대주의라고 말합니다. 반대의 경우는 쉽게 말해 절대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주의는 상대주의와는 달리 어떤 절대적인 진리가 있고, 이에 따라 한 가지의 가치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옛날에는 이런 절대주의적 윤리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같은 종교를 믿고, 모두 비슷비슷한 일을 하고, 비슷비슷한 생활을 하니 당연히 생각도 비슷해지겠지요. 이런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비슷한 기준을 가지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나고, 다른 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와 도시를 만들어 각기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하다못해 숨바꼭질 같은 놀이의 룰도 다르겠지요. 하물며 도덕적 판단은 어떨까요. 그러다보니 이런 사회에서는 상대주의가 설득력을 얻게 됩니다. 현대의 사회가 아마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주의도 나름의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덕이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도 옳고, 나도 옳고, 모두가 옳다면 무엇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어지므로 도덕적 판단이 더욱 어려워지게 됩니다. 아마도 그렇다면 사회는 무척 혼란해 질 수 있겠지요.

 

절대적이면서 상대적인 칸트의 윤리학

이런 문제에 있어서 아마도 칸트의 윤리학은 우리에게 많은 해결점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은 상대적이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지만 이 둘에게 흡족한 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칸트(1724~1804)가 살았던 당시의 세상은 점점 복잡해져가고 있었습니다. 급격하게 사회가 변화하고 있었지요. 이 말은 세상의 진리가 절대적이라는 믿음에서 벗어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칸트는 프러시아의 동쪽 국경 근처, 쾨니히스베르크에 살고 있었습니다. 큰 도시는 아니었죠. 그리고 그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아 그 작은 도시에 박혀 학문을 연구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칸트의 윤리학은 보수적인 입장을 갖고 있으면서 상대적 관점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칸트의 윤리학이 상대적 관점을 포괄하고 있다는 뜻은 그것이 행동의 결과를 놓고 판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회인지,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선하다고 생각하는 행동의 결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상대주의 관점과 비슷하지요. 또 누구든 선한 행동을 했다고 판단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나쁜 의도로 한 행동이 그런 결과를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결과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지만 무엇이 선한지에 대해서 칸트는 명확하게 대답을 합니다. 바로 선의지라고 말입니다. 조건 없이 선한 것은 오직 선하고자 하는 의지와 의무만이 선인 것이지요. 칸트에게 있어서 선은 보편적인 법칙과 같은 것입니다. 마치 뉴튼의 물리학이 시공간 속의 모든 사물들이 어떤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존재하듯 선 역시 어떤 법칙에 따릅니다. 그래서 누구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면 선이라는 보편적 법칙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법칙을 발견하고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행동한다면 그것이 곧 이라는 것이지요.

 

결과보다는 의도

여기서 결과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정치인이 정직이 옳은 가치이기 때문에 솔직하게 말한 것이 아니라 훗날 선거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정직하게 말했다고 해봅시다. 이런 경우라면 결과적으로 선한 일을 했지만 진실로 선하다고는 선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결과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선한 것은 선하므로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입니다. 그저 정직하고자 해서 정직했다면 그 사람은 선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미래를, 그러니까 결과를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선하고자 했었던 그 마음만이 순수하게 선한 것이 될 수 있죠.

정확하게 말하자면 칸트의 입장에서 보편적 선한 가치의 정점에 있는 것은 바로 종교적 신입니다. 보수적이고 절대적인 입장이지요. 인간은 신의 가치, 즉 선을 추구하고 찾아내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성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즉 우리의 이성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선하려고만 한다면 그 선함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만약 보편적인 선을 합리적으로 찾고 그것을 행하려는 의지를 사람들이 가졌다고 신뢰한다면 사회는 좀 더 자율적이고, 좀 더 민주적이 될 것입니다. 칸트의 윤리학이 현대 사회에서도 유용하게 언급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양육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의 행동을 평가하지 않고, 그들의 의도를 헤아린다면 아이들 역시 더 자율적이고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을까요?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