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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드 슈즈에는 "화장사"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에 화장사라는 직업이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화장사라는 말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면 화장사는 직업이 아니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라고 대답해야 한다.


연예인에게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화장을 해 주는 것이 요즘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아마 [레드 슈즈]에 화장사가 등장하는 장면이 낯설어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제까지 그 누구도 "화장사"에 대해 질문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 관계를 따지자면 무용수인 혜인이 화장사에게 화장을 받는 장면은 참으로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다. 당신의 연예인들은 자신의 화장을 본인이 했기 때문이다.


화장사라는 직업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해보자면 조선 보다는 일본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화장사라는 직업은 20~30년대에 일본에서 생겨나고 있었으며 이것은 화장품 판매와 직접적인 연결이 있었다. 돈이 많으 사람들, 높으신 분들의 집을 방문하여 화장품을 팔고, 맛사지를 해 주며, 화장을 해 주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 화장사이다. 화장사를 대동하여 화장을 하는 여인들은 응당 귀족층, 혹은 그에 준하는 위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화장사에게 화장을 받는 이유는 어딘가에 외출하기 위해, 아름다운 꾸밈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화장을 받는다는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함이었다. 물론 피부 미용과 아름다움이 목적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화장사가 조선에는 없었을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조선에는 관련된 기록이 전무하다. 그러나 나의 심증으로는 일본인과 준하는 기득권층일 경우 화장사를 알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게다가 일본의 높으신 분들과 친분이 있다면 화장사에게 화장을 받고 싶은 욕망이 반드시 존재했을 것이다. 화장사는 그렇게 생각한다면 굉장히 좋은 장치가 된다.


뮤지컬에서는 '화장사, 화장사!'라는 부름으로 소비되어버리고 말지만 화장사가 정말로 '화장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지를 찾기 위해 아마도 30권이 넘는 책을 본 것 같다. 일단 그것이 현실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면 그 이름은 평범한 고유명사가 되어 버리지만 그 존재를 모를 때에는 정말 무에서 빅뱅이 일어나 우주가 탄생되는 것과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국내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자료를 찾지 못했고, 까막눈으로 겨우겨우 '화장사'라는 단어를 발견하였을 때, 바로 그 때는 그야말로 빅뱅이 일어나게 된다. 그때부터는 '화장사'라는 키워드로 책들을 훑어볼 수 있고,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야말로 화장사라는 우주가 내 앞에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이 열리는 것, 바로 그런 거다.



2. 아주 어렸을 때,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였는지 4학년 때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어린 시절 늘 나는 주말의 영화를 보았다. 꼭 그걸 보고 잠이 들곤 했었는데, 아마도 그 날은 요때쯤과 같은 여름날 밤이었던 것 같다. 여름에 티비에서 방영되는 주말의 명화는 늘 공포영화였었다. MBC였던 것도 기억나고 8월이었던 것도 기억나는데, 불행하게도 영화 제목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선명하게 생각나는 영화인데 말이다.


그 영화는 귀신들린 집에 관한 내용이었다. 거기에는 한 할아버지가 등장하는데 그 할아버지는 늘 집에 틀어박혀서 집에 가득차 있는 책들을 꺼내 읽는 일로 소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환청을 듣고 있었는데, 어느날부터인가 그 소리가 선명해 지고 있었다. 집에 가득한 책들이 흔들리면서 아주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가 나를 이길 수 있는가, 니가 나를 이길 수 있는가?"

할아버지는 책장에서 쏟아지는 책에 깔려 결국 죽게 된다.



3. 사실 요즘 우울하다. 이유는 아마 여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귀결되는 것은 나의 빌어먹을 비루함 때문이다.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환원하면 더욱 비참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냥 다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화장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단어 하나를 쓸 때, 내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알아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냥 화장사에 관한 책을 한권 쓰는게 더 나을 것이다. 그게 비단 화장사 하나만일까? 에이포 한 장에 가득 담겨 있는 단어들이 내게는 모두 빅뱅이고 우주이다. 그리고 그게 에이포 한장으로 끝나는가? 그걸 누가 알아달라고 그렇게 쓰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무얼 위해서도 아니고, 그냥, 정말로 그냥.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게 못내 슬퍼진다.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책장은 끊임없이 말한다. "니가 나를 이길 수 있는가."


나는 도대체 누구랑 싸우고 있는 걸까.



4. 책들을 팔아야 겠다. 책들을 팔아서 돈이 생기면 박찬일 아저씨의 티라미수를 사먹어야겠다. 그게 나와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더 확실한 증거 아니겠는가. 맞다. 그게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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