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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서 잠이 깨지 않아 힘들었다. 요즘은 밤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9시 이후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해서, 설겆이를 하거나 어지러워진 책을 정리한다거나, 잠깐 티비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 

그래도 2시에 잠이 든다. 어줍지 않게 잠자리에서 인스타의 짧은 영상들을 보거나 한다. 허전함을 참지 못하고 잠들기까지 뭔가 그런거라도 해야 한다. 어제는 핸드폰을 잠자리에 두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그냥 잠이 들었다. 무조한 상태에서 잠이 드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래도 2시쯤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이 깨지 않아 힘들었다. 다시 인스타를 보았는데, 의미도 없는 짧은 영상들이 마구마구 돌아가는 걸 한시간이나 지켜보았다. 잠이 깨지 않는 아침의 시간은 너무나 아깝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일하러 나가는 DK를 따라 나서서 커피를 사고 그리고 비산동까지나 차에서 내리지 않고 가다가 로또를 파는 컨테이너 가게 앞에서 내려 로또를 두 장 사고 비산교를 지나 학의천으로 내려가 학운교, 내비산교, 수천교를 지나 도로쪽으로 올라오는 1시간짜리 산책을 했다. 

아무 것도 듣지 않고, 화면을 바라보지도 않고,

산책은 유용한 시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걷기만 한다는 것은 마음에 깊은 충족감을 준다. 지나가기만 했는데도 다리 이름이 외워지고, 길을 외우고,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살피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외우게 된다. 

DK가 마테오 리치의 기억의 궁전을 다시 읽으면서 암기에 대해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생겼다. 나 역시 한 번 본 것은 거의 잊지 않고, 드라마 같은 것들은 한 번만 보아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대사를 다시 복기하는 것을 자부하고 있던 탓에 정작 외워야 할 것들은 오히려 못외우는 일들이 허다했다. 아프리카 지도라든가, 원소의 주기율표라든가, 익혀야할 중국어 문장이라든가. 

이렇게 목적과 구조를 생각하지 않고 쓸데 없는 글을 쓰는 것이 나에게 필요한 것처럼, 쓸데 없이 좀 걸어다녀야겠다. 쓸데 없이 산책하고, 쓸데 없는 글들을 읽고, 쓸데 없이 잡담을 좀 해야겠다. 요즘 나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모든 것들이 귀찮아졌다. 11월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이 무기력증을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처리해야할 서류들이 싸여 있고, 마감을 지난 원고가 싸여 있고, 날 기다리는 대본까지 있는 이 와중에 그냥 모든 것들이 버거워졌다. 착착 일을 처리하던 나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오늘 문득 걷기라도 하자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쓸데 없이 걸어 가면서, 그리고 쓸데 없이 지나간 다리의 이름들, 비산교, 학운교, 내비산교, 수촌교를 외우고, 지난번 한 번 지나갔었던 수촌교 다음으로 나올 다리들, 대한교, 동안고, 관양교, 인덕원교를 기억하면서 나는 너무 쓸데 있는 일들만 하려고 애쓴건 아닐까 요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은 아무리 쓸모 없이 만들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온 힘을 다해서 쓸모 없는 시간들을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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