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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여행의 역사 상세보기
볼프강 쉬벨부쉬 지음 | 궁리 펴냄
한국 철도 100주년에 읽는 철도여행의 역사- 철도는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산업혁명의 위대한 기술혁신과 교통수단의 산업화 과정이 시민들의 체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문학,기술,경제,의학 등다방면에 걸친 철도의 역사를 삽화와 함께 조명했다.

소장형태: 대구
--> 결국 구입.


철도에 관한 이만한 명저를 보지 못했다.
철도와 근대의 여행에 대해 일괄한 책으로 국내에는 거의 유일하기 때문에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전 KTX 잡지 기고문에 이 책을 고대로 베껴 놓았더라.

사실, 잡지들을 보면 무슨 책을 배꼈는지 눈치 챌 때가 많다.
나 같은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글들을 읽으며 참 민망하기 짝이 없을텐데,
쓴 사람만 그것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어떤 잡문이든, 부끄럽지 않은 글을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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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시간의 소멸, 19세기 초에는 철도의 영향을 위와 같은 문구로 서술하였다. 이런 생각의 근거는 새로운 교통수단이 이루어낸 속도다. 전통적으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느 만큼의 여행 시간 혹은 운송 시간이 필요했던 주어진 공간상의 거리가 이 시기에 단숨에 극복될 수 있게 되었다. 달리 말해서, 동일한 시간에 과거의 몇 배에 달하는 공간상의 거리를 이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교통 경제학으로 보면, 이는 공간의 축소를 의미한다. <거리는 실질적으로 정확히, 사람이 스스로 움직이는 속도에 비례해서 짧아진다>고 [철도 경제]에 라드너는 언급해 두었다.

영국에서 초기 열차의 평균 속도는 32 내지 48킬로미터였는데, 이는 그때까지 우편 마차들이 도달할 수 있던 속도의 약 세 배이다. 말하자면 익숙하던 시간의 3분의 1로 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그 구간은 시간적으로 3분의 1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시간의 단축은 19세기 초의 글들에서는 일반적으로 공간의 수축으로 이해되었다. 1839년에 쓰여진 <<쿼터리 리뷰>>의 한 기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들이 이제까지 그로 인해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서로 영원히 나뉜 채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그 공간과 거리들이 점차적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중략)

철도가 공간과 시간을 없앤다는 생각은 각인되어 있던 교통 기술이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것에 의해 대체되었다고 느끼는 인지의 현실 상실로 이해할 수 있다. 철도가 만들어낸 공간-시간-관계는 원시 석기 기술식의 공간-시간-관계에 비하면, 추상적이고 방향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철도는 뉴턴 역학을 실현하면서, 원시 석기 기술에 기반한 교통의 특징들을 모두 정확히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도는 더 이상 마차와 길처럼 전경이라는 공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공간을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이네는 전통적인 공간-시간-의식이 이렇게 혼란을 겪게 된 순간을 잡아냈다. 1843년 파리에서 루앙과 오를레앙으로 가는 노선이 개통되었을 때, 그는 <무시무시한 전율, 결과를 예상할 수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엄청난 일, 혹은 전례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느끼는 그러한 무시무시한 느낌>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는 철도를 화약과 인쇄술 이래로 <인류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 삶의 색채와 형태를 바꾸어 놓은 숙명적인 사건>이라고 불렀다. 나아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제 우리의 직관 방식과 우리의 표상에 어떤 변화가 생길 것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도 흔들리게 되었다. 철도를 통해서 공간은 살해당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밖에 없다. ……이제 사람들은 세 시간 반 내에 오를레앙까지 그리고 꼭 같은 시간 내에 루엥까지 여행한다. 이 노선들이 벨기에와 독일까지 연결되고 또 그곳의 철도들과 연결된다면, 어던 일이 초래될 것인가! 내게는 모든 나라에 있는 산들과 숲들이 파리로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미 독일 보리수의 향내를 맡고 있다. 내 문 앞에는 북해의 파도가 부서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동일한 하나의 변화가 지니는 두 가지 모순적인 계기들을 분명히 언급하였다. 철도는 한편으로 이제까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공간들을 열어놓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일을, 그 사이의 공간을 없앰으로써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느리고 노동 집약적인 원시 석기 기술적인 수송에서는 완전히 소화해야만 했던 사이 공간 혹은 여행 공간이 기차 수송에서는 사라졌다. 기차는 단지 출발과 목적만을 안다. 1840년에 쓰여진 프랑스의 한 텍스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철도는 단지 장소로 드러나는 출발, 정지 그리고 도착만을 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철도는 완전히 무시한 채 이들 사이를 가로질러 가고, 거기서 단지 쓸모없는 구경거리만 제공하는 그 사이 공간들과는 아무런 연관도 갖지 않는다.> 

(중략)

생생한 연속성으로 경험되던 여행 공간의 상실에 대해 19세기는 특기할 만한 은유 하나를 개발해 냈다. 공간과 시간을 제거하는 힘으로 등장한 열차는 되풀이하여 총알로 표현된다. 총알 은유는 속도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라드너가 처음 사용하였다: 시속 120킬로미터로 빠르게 달리는 기차는 <총알보다 겨우 4배 정도 느린 속도로 달린다.> 그린하우에게는 기차가 달리는 동안 마치 총알처럼 보이게 하는 힘과 중압이 속도에 추가된다: <만일 어떤 물체가 아주 빠른 속도로 움직이게 되면, 그것은 실질적으로 총알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총알에 해당하는 모든 법칙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열차에 대한 문화적 적응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1889년까지도 이 총알 은유는 그 매력을 잃지 않았다. 이 해에 출간된 기술에 관한 한 글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시속 120킬로미터, 그것은 초속 34미터로, 이 속도로 움직이는 400톤의 에너지는 100톤짜리 암스트롱 대포에서 발사된 900킬로그램짜리 포탄이 내는 속도의 거의 두 배가 된다.>

열차가 총알로 비유되듯이 여행은 풍광을 관통하여 발사된 어떤 것처럼 체험되고, 보고 듣는 것을 지나쳐 버린다. 1844년에 나온 한 익명의 글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열차를 타고 하는 여행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자연 조망, 산이나 계곡의 아름다운 전망은 아예 사라져버리거나 아니면 왜곡되어 버린다. 지형을 오르고 내리는 것, 건강한 공기 그리고 ‘[거리’라는 말로 연결되는 다른 몯느 기분 좋은 연상들은 사라지거나 아니면 황량한 단절들, 어두운 터널들 그리고 위협적인 기관차의 건강하지 않은 가스 분출이 되어버린다.> 철로길, 푹 패인 절개지, 터널들은 총알로 발사도니 열사의 행로로서 나타난다. 이 총알 안에 앉아 있는 여행지들은 여행자이기를 그치고, 당시의 표현대로 짐짝이 되어 버린다. 러스킨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당신이 눈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눈이 멀었는지 그도 아니면 자고 있는지, 당신이 지적인지 아니면 멍청한지는 아무 상관없다. 당신이 타고 지나가는 그 땅에서는 아주 잘된 경우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지리학적인 구조와 전반적인 피상성뿐이다.

볼프강 쉬벨부쉬, [철도 여행의 역사],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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