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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영화인' 최고은 씨가 굶주림으로 사망한 이후 고진 책을 번역했던 조영일씨의 트윗이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조영일씨는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라도  최소한 밥을 공급해줄 사람은 확보해 놓아야 한다. 부모이든 남편이든"
"일전에도 썼지만 문학계에 여성작가가 많은 것은 상대적으로 생계에 대한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팔리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부모 또는 남편이 있기에" 라고 쓴 모양이고 예상할 수 있다시피 많은 사람들이 모욕감을 느끼고 그를 공격했다고 한다.  김영화를 비롯하여 김사과 등 많은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그 논쟁에 뛰어들었고 일명 '개거품'을 물며 서로를 헐뜯었단다.  나는 메일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는 처지이다보니 이런 일들이 저 먼세상 이야기였고, 겨우 아침에 잠깐 얼굴을 보여주는 나의 룸메이트님께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 논쟁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1.
사실 나는 이 논쟁과 관련한 글을 늦은 새벽까지 쓰다가 나의 룸메이트II가 깨 울어대는 바람에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컴퓨터를 끄게 되었다. 덕분에 오늘 낮은 완전히 비몽사몽하게 되었고, 새벽까지 쓴 글은 다시 읽지도 않고 지워버렸다. 그 논쟁이, 실은 무의미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논쟁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여성 문학의 지위에 대해, 혹은 순수 예술과 상업 예술, 혹은 대중에 영합한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미학적인 입장, 정치적인 입장에서 풀어낼 수도 있다. 영화인이었던 고인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여 열악한 우리나라의 영화 제작 시스템을 비판할 수도 있고, 문학과 예술을 떠나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구도에 대해 이야기 할 수도 있으며, 남성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우는 가련한 여성 비정규직의 문제로 이 이야기를 확대할 수도 있다. 나아가 자본주의와 사회 복지에 대해 이야기 할 수도 있으며 도시의 삭막한 비혼 일인 가정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주 우리가 원초적으로 한탄하는 것은 왜 그 지경이 되도록 부모에게, 친구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는가,이다. 그리고 다시 왜 그녀는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았는가,이다.  거기서 우리는 조영일의 언급을 다시 떠올릴 수 밖에 없고,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음은 생계에 무책임한 것으로, 가까운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지 않은 것은 손을 내밀 수 없음, 즉 손 내밀 가까운 누군가가 없음으로 귀착하게 된다.

아, 그녀는 왜, 그랬는가. 눈물겹게 물어 보고 싶다, 왜, 알바도 안하고, 하다못해 하루에 한번 안부를 묻는, 혹은 밥을 사주는 남자친구도 안만들어 놓았는가.

그러나 이 한탄은 12시가 넘은 술자리에서만, 그것도 모두 취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정신이 말짱할 때 저런 한탄을 했다가는 여성의 독립성을, 영화 시스템 혹은 예술 작가의 전문성을 음해하는 비아냥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영일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인간적인 연민을 약간 덧붙여, 나는 그가 다만 이런 발언에 필요한 적절한 사적인 타이밍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개거품' 논쟁의 지경까지 온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역시 가슴을 쓸어 내리는 안타까움이 있지 않았겠는가.

어쨌거나 이런 논쟁 따위는 지지부진하고, 이 시점에서는 그다지 의미있지도 않다. 한 작가의 아사를 두고 순수 예술과 예술의 경제, 혹은 상업성에 대해 논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그런 논쟁은 저 책장 한 켠에 있는 미학책 한권과 노트필기 몇 장이면 충분하다. 예술이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와는 별개로 작가는 엄연히 밥을 먹는 존재이고, 그 밥은 그의 창조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훈 선생이 늘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자신은 밥을 벌기 위해 쓴다고. 조영일씨가 숱한 모순으로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제대로 피력하는데 실패해버린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작가가 커피잔 앞에서 우울과 고독, 그리고 공상을 동반해 무언가를 끄적이는 사람이라는 낙인 때문이다. 작가는 엄연한 '직업'이고, '직업'은 그 누군가의 생계를 담당할 수 있어야 직업이 될 수 있다. 학생이 직업이 아닌 신분인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물론 부모와 남편, 혹은 아내의 조력으로 진정한 '직업'이 아닌 취미로 책을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작가라는 직업으로서 밥벌이에 치열하고 또 치열할 수 밖에 없다.

나 같은 애매모호한 '인정받지 못한' 작가가 밥벌이에 치열해야 한다면, 치열하게 쓸 것이다. 당장의 밥을 위해. 그러나 나 같이 부모의 조력이 있고, 남편의 벌이가 있다면 치열해지지 않는다. 잠을 쪼개 써야할 이유가 없고, 우는 아기를 들쳐업고 써야할 명분이 없다.

그렇다. '밥을 먹여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이것은 내가 '작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늘 기도한다. '내 밥은 내가 먹게 해 주소서.' ^^;


2.

여성 문학이 주목받기 시작한지 근 20년이 되었다. 여성적 글쓰기는 우울과 몽롱한 감상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인식때문에 글을쓰는 여성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 허다했다. 나 같은 경우에도 '글만 보았을 때는 남자인줄 알았다', '문체가 남성적이다', '여자라는 생각은 안해보았지만 여자라면 덩치가 크고 키가 큰 남자같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와 같은 말을 들으면 묘한 승리감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여성적 글쓰기의 의미가 좀 바뀌었고 이제 여성 작가들은 여성의 정체성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문학계에서는 여성 작가에 좀 더 주목하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도 등단하는 젊은 여성 작가들이 남성작가들에 비해 눈에 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삭막한 자본주의 세계에서 문학이라는 나긋나긋한 영역이 다분히 비경제적이고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판에 -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도 반대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문화와 예술까지도 경제적이고 생산적인 상품으로 이미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 말랑말랑한 일군의 여성 작가들은 문학과 예술의 영역을 더욱 소외시키는 오래된 가부장적 시선을 끌어들이기 쉽다. 즉 소설 나부랭이, 시 나부랭이가 그저 할일 없는 여자들이나 쓰고 읽는 것처럼 치부되기 쉽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또 다른 긴 논쟁이 필요하다. 소설과 시의 가치, 예술의 가치, 문화의 가치를 거론해야 하고, 그 안에서 여성의 위치, 남성과 여성의 가치와 어울림에 대해 다시 이야기 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한가지 질문을 해야 할 것 같다. 정말 여성 작가들이 문학계를 움직이고 있는가? 여성 작가가 정말 문학 영역에 큰 할당량을 차지하고 있는가? 정말로?

그렇다면 왜 해마다 등장하는 젊은 여성 작가들은 나이가 들지 않는가? 몇년 전만 해도 평단의 주목을  받던 천** 작가는 어디로 갔는가? 생각만큼 장편이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잊혀져 버린 것인가? 그럼 Y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H는? K는?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단편 몇 편에 문학계에 큰 획을 그을 작가가 탄생한 것처럼 떠들어대던 그 평단은, 계간지는, 출판사는 그들을 계속 주목하는 대신 또 다른 젊은 여성 작가에게 또 다른 찬사를 보내는가?

여성 작가가 정말로 문학계를 좌지우지 한다면 왜 20대에 등단해서 문학인으로 안착한 30대 후반의 작가는 없는가. 여성 문학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제 그런 작가들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여자 성석제는? 여자 김연수는? 여자 김영하는 왜 없는가? 정말 여자들이 있는 것은 맞는가?

출판사는 젊은 여성 작가를 마치 아이돌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적당히 바람잡아 어느 정도 팔리면, 다시 새로운 아이돌을 발굴해 파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3.

사실 나는 모든 이야기를 접고 그냥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이야기도 그냥 그렇다. '밥 벌이'를 남편에게 헌납하고 대신 변기에 묻은 남편의 오줌 방울을 닦는 삶은 사소하고도 또 사소하다. 사소한 일로 사소하게 화가나고 사소한 일로 행복하다. 사소한 일로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면 남편은 사소한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밥'을 남에게 의존하는 이의 곤궁함이다.

작가에게 그 곤궁함을 강요하지 말라. 배를 곯는 것이 곤궁함이 아니다. 배는 고파야 한다. 이것은 예술가는 배가 고파봐야 한다는 말과는 다른 의미이다. 작가는, 적어도 작가라면 배를 곯아야 하고, 그 배를 자신이 채워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스스로 작가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배고픔이 그립다.





P.S 1. 

최고은 씨의 사망과 조영일 씨의 글과 관련한 논쟁을 접하고 뭔가를 좀 쓰고 싶어 블로그를 펼친지 3일만에 나는 이 글을 완성했다. 평소 같으면 30분이면 썼을 것이다. 아기 키우는 일은 늘 만만치가 않다.

이상하게도 글을 쓰려고 블로그를 연 이후로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나는 최고은 작가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잠시 내게 다녀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뜻을 채 펼치지 못한 작가들의 동지감.

아, 신이시여, 내가 이대로 죽지 않게 해 주소서.




P.S.2

그러고보니 나의 룸메I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사실 밥벌이는 완전한 인간의 독립성을 뜻하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사실 룸메I은 밥벌이에 자신을 희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만 포기하고 희생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늘 가부장제에 희생되는 것은 여자만이 아니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남편을 밥벌이에 내몰다니, 미안하다.

우리는 가부장적 관계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육아는 남자가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젖먹이를 키운다는 것은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젖을 먹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 계속해서 먹는 이야기 뿐이구나.


p.s. 3

아가 때문에 밥벌이를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글  쓸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블로그를 쓰는 난 대체 뭔지.... 원고는 도대체 언제 쓸건지...... 쩝.





p.s 4

포털 메인에 김영하의 글이 기사로 떴는데, 고 최고은씨에 대한 궁금증이 좀 풀렸다. 역시나 원래 건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고인의 명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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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은 기사 내용> -- 전문은 요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2141005061&code=940100

그는 “마지막으로 고은이에 대해 한 가지만 말하고 싶다”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고은이가 굶어죽었다고 당연히 믿고 있다는데 놀랐다”며 “아마도 최초로 보도된 선정적 기사 때문일 것이다. 신문에서 보도한 쪽지도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고 말했다.

이어 “물론 그녀가 풍족하게 살아갔다는 것은 아니지만 의연하고 당당하게 자기 삶을 꾸려갔다고 들었다”며 “그녀의 직접 사인은 영양실조가 아니라 갑상선기능항진증과 그 합병증으로 인한 발작이라고 고은이의 마지막을 수습한 친구들에게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진실은 아직 누구도 모른다. 사람들은 편한대로 믿고 떠들어댄다”며 “갑상선 기능항진증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지고 그러면서 몸은 바싹 말라가는 병이다. 불면증도 뒤따르고 이 불면증은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진실을 외면한채 고은이를 아사로 몰고 가면서 가까웠던 사람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최고은 작가에 대해 “재능있는 작가였다. 어리석고 무책임하게 자존심 하나만으로 버티다가간 무능한 작가가 아니었다”고 평가하며 “그녀를 예술의 순교자로 만드는 것도, 알바 하나도 안 한 무책임한 예술가로 만드는 것도 우리 모두가 지양해야할 양 극단이라는 것만은 말해두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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