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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고, 일을 어쩔까.
어제 마지막 산전 검사를 갔다.
예약이 늦게 된데다가 내가 늦어버려서 애매하게 점심시간에 걸쳐버리게 되어서, 손님(환자)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나만 이리저리 검사실을 오가며 점심시간에 남아 있는 간호사들과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그런 와중에 나 말고 다른 손님이 또 있었는데, 임신 22주가 된 고3 아이였다.
엄마로 보이는 사람과 둘이 앉아있는데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가, 내가 긴 검사를 마치고 나오자 그 아이의 동행은 한 남자 아이와, 성인 남자가 덧붙여져 있었다. 중년남녀는 남자 아이의 부모인 것 같았고, 여자 아이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남자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은 어떻게 할거냐고 남자 아이를 다그치고 있었고, 중년남자는 창밖을 보고 있었고, 남자 아이는 똑바로 고개를 들고 중년여자에게 강력한 무언가를 피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웬지 나는 무척 안심했다.
2. 어머나, 너무 이쁘세요.
임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사실 다양하지 못하다.
어떤 옷을 입어도 배가 볼록하게 꽤 많이 나올무렵, 그러니까 8개월 후반부터는 이상하게 유난히 이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쁘다는 말은 잘 하지않는 친구들, 특히 친구들 중의 남자애들 -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남녀 관계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선이 있기 마련인데, 적어도 내 친구들은 나에게 야, 너 오늘 왜 이리 이쁘냐와 같은 말들은 거의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쁘다,라든가 미인이다,라는 말은 룸메의 친구들이 룸메에게 건내는 말 정도이다. - 물론 인사치레이겠지만-
그런데 임신을 하고나니 오히려 친구들도 이쁘다는 말을 한다. 야, 임신하더니 살도 하나도 안찌고 오히려 더 이뻐지냐..와 같은 말들. 물론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겠지만, 신기하게도 이 말 참 많이한다.
친구들이야 나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니 그렇다고 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도 이쁘다는 말을 참 많이 건낸다.
아저씨, 아줌마, 간난쟁이를 유모차에 끌고 가는 새댁들 등등. 지나가다가 뜬금없이 이쁘다고 말을 건내거나,
아니면 지나가며 건내는 말로 으레 성별을 묻거나, 예정일을 묻거나 하는 것이었고 그리고는 꼭, 임산부가 곱다, 배가 볼록한데도 너무 이뻐요, 산모가 이쁘면 아들이라던데, 등등의 말들이었다.
사실, 정말로 내가 이쁜지 안이쁜지는 모르겠지만
평소때는 자주 듣는 말이 아닌지라, ^^;;;;;;;; 자꾸만 듣는 이 말이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서도 기분이 묘하다고나 할까.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내가 이쁘다는 말을 자주 듣는 것과 반비례해서 소위 말하는 사회적 대우는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직업이 무엇인가요? 어떤 일을 하세요. 등의 질문은 거의 받지 못한다.
심지어 신상을 묻는 은행이나 공공기관 같은 곳에서도 그런 질문은 묻지 않고 대뜸 남편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한번은 왜 내가 싱글맘일 수도 있는 가능성은 완전하게 배제하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어, 남편 직업을 반드시 밝혀야 되냐고 묻고 남편이 없다,고 말하니 "남편 직업이 없으시면 가입이 곤란하신데요."라는 말을 했다.- 아마도 은행이었을 것이다.-그 담당자에게는 남편의 직업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보호자가 필요했고, 응당 직업이 없는 주부는 가입이 안된다는 뜻으로 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나는 이쁘다는 말을 들었다.
자, 그럼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에게 이쁘다고 말하는가?
정말 얼굴이 이쁜 사람에게? 뭐, 것도 그렇겠지.
그럼 이건 어떤가? 어떤 변호사가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지나간다. 물론 여자이다. 그를 붙들고 우리는 어머, 너무 이쁘세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 뭐- 할 수도 있지.
그런데 정말로 권위, 지위, 힘, 이성적, 냉철함, 지적임과 "'이쁘다""는 내뱉음이 쉽게 공존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 누군가가 보호해야 할 정도로 약할때, 더 많이 이쁘다고 내뱉지는 않는가?
3. 이야기는 다시
사회는 많이 바뀌었다지만, 과연 임신한 고등학생은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있을까.
아마, 병원에서의 그 장면을 보고 나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안심했을 것이다. 애를 낳든 어쨌든, 남자 아이가 내빼지 않고 있고, 남자 아이의 부모가 보호자의 역할을 자처했다는 사실이 모두를 안심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대목에서 안심해야 하는 것일까.
여자친구를 임신시키고, 두려움에 떨다가 그 아이 내 애가 맞기는 한거야?라는 질문을 던지는 겁쟁이들이 비일비재하고,
그 겁쟁이들만큼 부들부들 떨다가 아무말 없이 연락을 끊어버리는 비겁쟁이들이 많은 이 현실에서 분명 그 남자아이의 존재는 듬직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왜 임산부는 보호자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임산부는 배려의 대상이지 보호의 대상은 아니다.
임산부를 위해 버스는 좀 더 기다려줘야 하고, 지하철의 승객들은 자리를 양보해 줘야 하고,
무거운 짐을 나누어 들어줘야 하지만,
누군가가 임산부의 결정을 대신해 줘야 하고, 누군가가 보증을 서 줘야 하고,
누군가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보장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임산부에게 이쁘다는 말을 건내기보다 - 물론 아무나 다 이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아니겠지만 -_-;;;
임산부가 여전히 사회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하고, 그래서 임산부가 정장을 입고 다니는 것이 당연하며,
그래서 임산부에게도 남편의 이름과 직업을 묻기 보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당신은 누구신가요??
라고 물어야 한다.
임산부가 독립적 인간이 된다면,
큰일을 저지른 고등학교 임산부는 여전히 독립적이고 사회적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으며
그것은 다른 국면, 즉 급한 결혼으로 해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이쁘다는 말을 듣는 이 임산부는, 썩 즐겁지만은 않다.
P.S 그러나저러나 그 고딩임산부 수능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시험보기 힘들겠다. 2시간만 앉아 있어도 허리아프고 확 지칠텐데, 어쩌냐..
어제 마지막 산전 검사를 갔다.
예약이 늦게 된데다가 내가 늦어버려서 애매하게 점심시간에 걸쳐버리게 되어서, 손님(환자)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나만 이리저리 검사실을 오가며 점심시간에 남아 있는 간호사들과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그런 와중에 나 말고 다른 손님이 또 있었는데, 임신 22주가 된 고3 아이였다.
엄마로 보이는 사람과 둘이 앉아있는데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가, 내가 긴 검사를 마치고 나오자 그 아이의 동행은 한 남자 아이와, 성인 남자가 덧붙여져 있었다. 중년남녀는 남자 아이의 부모인 것 같았고, 여자 아이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남자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은 어떻게 할거냐고 남자 아이를 다그치고 있었고, 중년남자는 창밖을 보고 있었고, 남자 아이는 똑바로 고개를 들고 중년여자에게 강력한 무언가를 피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웬지 나는 무척 안심했다.
2. 어머나, 너무 이쁘세요.
임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사실 다양하지 못하다.
어떤 옷을 입어도 배가 볼록하게 꽤 많이 나올무렵, 그러니까 8개월 후반부터는 이상하게 유난히 이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쁘다는 말은 잘 하지않는 친구들, 특히 친구들 중의 남자애들 -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남녀 관계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선이 있기 마련인데, 적어도 내 친구들은 나에게 야, 너 오늘 왜 이리 이쁘냐와 같은 말들은 거의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쁘다,라든가 미인이다,라는 말은 룸메의 친구들이 룸메에게 건내는 말 정도이다. - 물론 인사치레이겠지만-
그런데 임신을 하고나니 오히려 친구들도 이쁘다는 말을 한다. 야, 임신하더니 살도 하나도 안찌고 오히려 더 이뻐지냐..와 같은 말들. 물론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겠지만, 신기하게도 이 말 참 많이한다.
친구들이야 나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니 그렇다고 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도 이쁘다는 말을 참 많이 건낸다.
아저씨, 아줌마, 간난쟁이를 유모차에 끌고 가는 새댁들 등등. 지나가다가 뜬금없이 이쁘다고 말을 건내거나,
아니면 지나가며 건내는 말로 으레 성별을 묻거나, 예정일을 묻거나 하는 것이었고 그리고는 꼭, 임산부가 곱다, 배가 볼록한데도 너무 이뻐요, 산모가 이쁘면 아들이라던데, 등등의 말들이었다.
사실, 정말로 내가 이쁜지 안이쁜지는 모르겠지만
평소때는 자주 듣는 말이 아닌지라, ^^;;;;;;;; 자꾸만 듣는 이 말이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서도 기분이 묘하다고나 할까.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내가 이쁘다는 말을 자주 듣는 것과 반비례해서 소위 말하는 사회적 대우는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직업이 무엇인가요? 어떤 일을 하세요. 등의 질문은 거의 받지 못한다.
심지어 신상을 묻는 은행이나 공공기관 같은 곳에서도 그런 질문은 묻지 않고 대뜸 남편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한번은 왜 내가 싱글맘일 수도 있는 가능성은 완전하게 배제하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어, 남편 직업을 반드시 밝혀야 되냐고 묻고 남편이 없다,고 말하니 "남편 직업이 없으시면 가입이 곤란하신데요."라는 말을 했다.- 아마도 은행이었을 것이다.-그 담당자에게는 남편의 직업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보호자가 필요했고, 응당 직업이 없는 주부는 가입이 안된다는 뜻으로 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나는 이쁘다는 말을 들었다.
자, 그럼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에게 이쁘다고 말하는가?
정말 얼굴이 이쁜 사람에게? 뭐, 것도 그렇겠지.
그럼 이건 어떤가? 어떤 변호사가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지나간다. 물론 여자이다. 그를 붙들고 우리는 어머, 너무 이쁘세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 뭐- 할 수도 있지.
그런데 정말로 권위, 지위, 힘, 이성적, 냉철함, 지적임과 "'이쁘다""는 내뱉음이 쉽게 공존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 누군가가 보호해야 할 정도로 약할때, 더 많이 이쁘다고 내뱉지는 않는가?
3. 이야기는 다시
사회는 많이 바뀌었다지만, 과연 임신한 고등학생은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있을까.
아마, 병원에서의 그 장면을 보고 나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안심했을 것이다. 애를 낳든 어쨌든, 남자 아이가 내빼지 않고 있고, 남자 아이의 부모가 보호자의 역할을 자처했다는 사실이 모두를 안심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대목에서 안심해야 하는 것일까.
여자친구를 임신시키고, 두려움에 떨다가 그 아이 내 애가 맞기는 한거야?라는 질문을 던지는 겁쟁이들이 비일비재하고,
그 겁쟁이들만큼 부들부들 떨다가 아무말 없이 연락을 끊어버리는 비겁쟁이들이 많은 이 현실에서 분명 그 남자아이의 존재는 듬직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왜 임산부는 보호자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임산부는 배려의 대상이지 보호의 대상은 아니다.
임산부를 위해 버스는 좀 더 기다려줘야 하고, 지하철의 승객들은 자리를 양보해 줘야 하고,
무거운 짐을 나누어 들어줘야 하지만,
누군가가 임산부의 결정을 대신해 줘야 하고, 누군가가 보증을 서 줘야 하고,
누군가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보장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임산부에게 이쁘다는 말을 건내기보다 - 물론 아무나 다 이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아니겠지만 -_-;;;
임산부가 여전히 사회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하고, 그래서 임산부가 정장을 입고 다니는 것이 당연하며,
그래서 임산부에게도 남편의 이름과 직업을 묻기 보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당신은 누구신가요??
라고 물어야 한다.
임산부가 독립적 인간이 된다면,
큰일을 저지른 고등학교 임산부는 여전히 독립적이고 사회적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으며
그것은 다른 국면, 즉 급한 결혼으로 해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이쁘다는 말을 듣는 이 임산부는, 썩 즐겁지만은 않다.
P.S 그러나저러나 그 고딩임산부 수능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시험보기 힘들겠다. 2시간만 앉아 있어도 허리아프고 확 지칠텐데, 어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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