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이 글을 읽었다. 당시 나에게 죽음이란, 그리고 죽음에 대한 슬픔이란 속으로 삭히고 덮어서 아리고 아린 상처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글에서 그것은 그저 폭탄처럼 터져나오는 슬픔이었다.
이런 문장이, 이런 표현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나, 충격이었고, 놀라웠고,
그래서 너무 슬펐더랬다.
오랜 시간이 지나 고등학교 때 읽었던 이 글이 생각나 다시 찾아보았다.
긴 시간이 지났지만 내가 그 문장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들이 놀라울 따름이다.
다시 읽는 지금에도 그 슬픔이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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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만만한 건 신(神)이었다.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번 고쳐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殺意), 내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있어야 돼.
어젯밤엔 맥주 대신 소주를 마셨더니 좀 잔 것 같다. 꿈을 꾸었으니까.
난리가 나서 허둥거리며 피난을 가고, 사람들이 죽고, 거리가 삼엄하고,
양식이 동이 나는 꿈이었다. 꿈속에서도 올림픽 첫날에 난리가 나서 다 중단됐다고 했다.
내란 같기도 하고 천재지변 같기도 한 묘한 공포 분위기였건만 깨어나니까 좋은 꿈을 놓치고 난 것처럼 허전했다.
내 아들이 없는데도 온 세상이 살판난 것처럼 들떠 있는 올림픽의 축제 분위기가 참을 수 없더니,
내 아들이 없는 세상 차라리 망해버리길 바란 거나 아니었을까.
내 무의식을 엿 본 것 같아 섬뜩했다. 아아, 천박한 정신의 천박한 꿈이여,
내 아들아, 어쩌면 에미를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드니.
통곡이 치받쳤다. 며칠 동안 주리 참듯 참던 울음이었다.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참으려니 온몸이 격렬하게 요동을 쳤다.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이런 끔찍한 극형에 당해서는 그 영문을 물을 권리가 있다.
신의 권위가 장난질칠 권리가 아닌 바에야 의당 그 극형이 무슨 잘못에서 연유했는지 밝혀줘야 한다.
신, 당신의 존재의 가장 참을 수 없음은 그 대답 없음이다. 한 번도 목소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있는 것처럼 느끼고, 부르고, 매달리게 하는 그 이상하고 음흉한 힘이다.
영원히 순화될 것 같지 않은 원색적인 포악이 거침없이 치밀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신의 문제는 나는 무엇일까 하는 나의 내면응시로 귀착되고 만다.
생전에 무심히 그저 잘 나왔다, 못 나왔다 정도의 평을 하며 보던 사진들이
한 장 한 장 생전의 모습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나 에미의 살갗을 으스러뜨리며 에미 안으로 스민다.
내 아들아. 이 세상에 네가 없다니 그게 정말이냐…
창창한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건 가장 잔인한 최악의 벌이거늘 그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벌을 받는단 말인가.
이 어미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벌을 주는 데 이용하려고 그 아이를 그토록 준수하고 사랑 깊은 아이로 점지하셨더란 말인가.
하느님이란 그럴 수도 있는 분인가. 사랑 그 자체라는 하느님이 그것밖에 안 되는 분이라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아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 아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땅속에 누워 있는 것일까?
내 아들이 어두운 땅속에 누워 있다는 걸 내가 믿어야 한다니. 발작적인 설움이 복받쳤다.
나는 내 정신이 미치기 직전까지 곧장 돌진해 들어갔다가 어떤 강인한 저지선에 부딪혀 몸부림치는 걸
여실하게 느낀다. 그 저지선을 느낄 수 없어야 미칠 수 있는 건데 그게 안된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정말 있다면 내 아들의 생명도
내가 봉숭아를 뽑았듯이 실수도 못되는 순간적인 호기심으로 장난처럼 거두어간 게 아니었을까?
하느님 당신의 장난이 인간에겐 얼마나 무서운 운명의 손길이 된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
당신의 거룩한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이렇게 막 가지고 장난을 쳐도 되는 겁니까.......
주여, 그렇게 하찮은 존재에다 왜 이렇게 진한 사랑을 불어넣으셨습니까.
내 아들이 죽었는데도 기차가 달리고 계절이 바뀌고 아이들이 유치원을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까지는 참아주었지만 88올림픽이 그대로 열린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내 자식이 죽었는데도 고을마다 성화가 도착했다고 잔치를 벌이고 춤들을 추는 것을 어찌 견디랴.
아아 내가 독재자라면 1988년 내내 아무도 웃지 못하게 하련만... 미친년 같은 생각을 열정적으로 해 본다.
나는 주위의 만류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들의 장례에 달려갔었다.
못할 노릇인 줄은 남이 말해주기 전에 이미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식 잡아먹은 죄로 어떡하든 그 벌을 받아내지 못하면 따라 죽게 되든지 하다못해 까무러치기라도 한 줄 알았다.
정신의 고통이 어느 한계까지 차올랐을 때, 기절할 수 있는 장치가 돼 있는 몸을 가진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내 몸과 마음에는 불행히도 그런 장치가 빠져 있었다. 내가 자신을 독종이라고 저주하는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다.
나는 신이 생사를 관장하는 방법에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고, 특히 그 종잡을 수 없음과 순서 없음에 대해선
아무리 분노하고 비웃어도 성이 차지 않지만 또한 그런고로 그분을 덧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오직 그분만이 생사를 관장하고 있다고 신의 권위를 믿었고, 불쌍하게도 깊이 공구(恐懼)하고 있었다.
문득 내가 아들 대신 딸 중의 하나를 잃었더라면 이보다는 조금 덜 애통하고,
덜 억울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해보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 자체가 두려워 나는 황급히 성호를 그었다.
행여 또 그런 생각이 떠오를까봐 속으로 주모경을 외웠다.
그래도 두려워 화장실에 가서 울며 용서를 비는 기도를 했다.
오랜만에 해보는 기도였다. 그래도 두려움과 가슴의 울렁거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해인 수녀의 방문을 받았다. 남편의 병중, 상중에도 기도와 위로를 아끼지 않아 큰 힘이 되었는데
여기서 또 이런 꼴을 보이다니, 부끄럽고 숨고 싶었다. 딸애가 있는 대로지만 정성껏 점심을 지어 대접했다.
식사 후 수녀님한테 눈물을 보이고부터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사진첩까지 꺼내놓고 아들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그애가 얼마나 특별한 아인지,
나에게 꼭 있어야 할 아들일 뿐 아니라 직업인으로서도 이 사회에 얼마나 필요한 인물인지,
그리고 동기간과 일가친척 사이에서 얼마나 사랑과 기대를 모았었는지, 눈에선 눈물을 쉴새없이 흘리며,
입에선 침이 마르게 늘어놓았다. 그동안 가족들 사이에선 상처를 피하듯이 조심스럽게 화제에 올리기를 삼가던
아들 얘기를 그 애를 전혀 알지 못하는 수녀님을 상대로 마치 걸신들린 것처럼 지칠 줄 모르고 해댔다.
특히 우리가 얼마나 특별하고도 완전한 모자 사이였다는 걸 강조할 때 내 허망한 열정은 극에 달했다.
막연한 불안과 함께 예전에 본 미국 영화 속의 사이코 엄마 생각이 났다. 나도 이러다 사이코가 되는 게 아닐까.
주를 믿어서도 사랑해서도 아닌, 단지 공포 때문에 올리는 기도란 얼마나 참담한가.
참담 그 자체, 그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 중 어린 수녀님이 속세의 친구에게 하는 소리가 문득 내 관심을 끌었다.
수녀원에 들어오기 전 얘기였다. 남동생이 어찌나 고약하게 구는지 집안이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왜 하필 내 동생이 저래야 되나? 비관도 되고 원망스럽기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세상엔 속썩이는 젊은이가 얼마든지 있다, 내 동생이라고 해서 그래서는 안 되란 법이 어디 있나'
'내가 뭐관데....'라고 생각을 고쳐먹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동생과의 관계도 호전이 되더라고 했다.
'왜 내 동생이 저래야 되나?'와 '왜 내 동생이라고 저려면 안 되나?'는 간발의 차이 같지만
실은 사고의 대전환이 아닌가. 나는 신선한 놀라움으로 그 예비 수녀님을 다시 바라보았다.
내 막내딸보다도 앳돼 보이는 수녀님이었다. 저 나이에 어쩌면 그런 유연한 사고를 할 수가 있었을까?
내가 만약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갔을까?'라는 집요한 질문과 원한을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란 법이 어디 있나'로 고쳐먹을 수만 있다면,
아아 그럴 수만 있다면. 구원의 실마리가 바로 거기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남에게 뭘 준 적이 없었다. 물질도 사랑도.
내가 아낌없이 물질과 사랑을 나눈 범위는 가족과 친척 중의 극히 일부와 소수의 친구에 국한돼 있었다.
그 밖에 이웃이라 부를 수 있는 타인에게 나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위선으로 사랑한 척한 적조차 없었다.
물론 남을 해친 적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모르고 잘못한 적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의식하고 남에게
악을 행한 적이 없다는 자신감이 내가 신에게도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대들 수 있는 유일한 도덕적 근거였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은,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야말로 크나큰 죄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 벌로 나누어도 나누어도 다함이 없는 태산 같은 고통을 받았음을, 나는 명료하게 깨달았다.
하필 변기 앞에 무릎 꿇은 자세로, 나는 그 정답에 머리 숙여 승복했다.
나중에 나의 간지(奸智)가 또다시 빠져나갈 구멍을 찾게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은
그건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정답이었다. 그리고 구원이었다. 고통도 나눌 가치가 있는 거라면 나누리라.
역설적인 얘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나의 홀로서기는 내가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가까이서 멀리서 나를 염려해준 여러 고마운 분들을 비롯해서 착한 딸과 사위들, 사랑스러운 손자들 덕분이다.
나만이 알고 느끼는 크나큰 도움이 또 있다. 먼저 간 남편과 아들과 서로 깊이 사랑하고 믿었던 그 좋은 추억의
도움이 없었다면 내가 설사 홀로 섰다고 해도 그건 허세에 불과했을 것이다. 나는 요즈음 들어 어렴풋하고도
분명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이런 도움이야말로 신의 자비하신 숨결이라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주여, 저에게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여 너무 집착하게는 마옵소서."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에 대해 과연 무엇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아들이 인턴 과정을 끝마치고 전문의는 무슨 과를 택할까 의논해왔을 때 생각이 났다.
그애는 나만 반대하지 않는다면 마취과를 하고 싶다고 했다. 뜻밖이었다.
나는 아들로 인하여 자랑스럽고 우쭐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누가 시키거나 애써서가 아니라 그애 스스로가 선택한 학교나 학과가
에미의 자긍심을 충분히 채워주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으레 그러려니 했다.
내 무지의 탓도 있었지만 마취과는 어째 내 허영심에 흡족치가 못했다.
나는 왜 하필 마취과냐고 물었다. 그애는 그 과의 중요성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런 식으로 말해서 중요하지 않은 과가 어디 있겠니?
이왕 임상을 할려면 남보기에 좀더 그럴 듯한 과를 했으면 싶구나."
나는 내 허영심을 숨기지 않고 실토했다. 그때 아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어머니, 마취과 의사는 주로 수술장에서 환자의 의식과 감각이 없는 동안
환자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가 무사히 수술이 끝나고 의식이 돌아오면 별볼일이 없어지기 때문에
환자나 환자 가족으로부터 고맙다든가 애썼다는 치하를 받는 일이 거의 없지요.
자기가 애를 태우며 생명줄을 붙들어준 환자가 살아나서
자기를 전혀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이겠어요.
전 그 쓸쓸함에 왠지 마음이 끌려요."
그 아들에 그 에미랄까,
나 또한 아들의 마음이 끌린 쓸쓸함에 무조건 마음이 끌려 그애가 원하는 것을 쾌히 승낙했다.
늘 사랑과 칭찬만 받으면서 자라 명랑하고 거침이 없고
남을 웃기기 잘하고 농담 따먹기에 능하던 아들의 전혀 새로운 면이었다.
나는 그때 아들에 대해 새롭게 알았다.
품안의 자식인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알아버렸다가 아니라
알아야 할 무진장한 걸 가진 대상으로 우뚝 섰을 때 얼마나 대견했던지,
그리고 그때의 그 앎의 시작에 대한 설레임까지
꼬바기 밝힌 새벽 빛 속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일년 전, 내가 그렇게 고통하고 신음할 때, 수없이 되물었던 질문,
하느님, 한 말씀만 하시옵소서. 그러나, 하느님은 일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없으시다.
그러나, 그 고통의 순간을 지나올 때, 내가 그렇게도 원망할 하느님이 계셨다는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나의 원망을 받아줄 하느님이 안 계셨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고통의 순간에 수많은 원망섞인 질문을 던질 때, 그 많은 원망을 고스란히 들어주셨던 하느님
그분의 침묵은 더 많은 원망을 듣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배려였던 것이다.
<한 말씀만 하소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