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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과 협동조합운동           2011. 6. 3. 26시      한살림 교육장

녹색평론사, 모심과살림연구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한국협동조합연구소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부산노동자생협 혁신네트워크, 민주노총, 한국노총

    

 

한국 노동운동과 협동조합운동

 

박승옥(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공동대표)

 

 

한국 노동운동이 잃어버린 자유인들의 결사체 공동체운동

 

- 1970년 전태일의 산화 이래 전개된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새로운 공동체운동이었다. 노동조합은 새로운 인간관계의 마당이자 새로운 공동체였다. 산업선교와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소모임, 노동조합의 각종 소모임은 그 자체가 강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 소공동체 운동체였다. 소모임은 그 어떤 거창한 이념 학습의 조직이 아니었다. 그냥 일상의 희로애락을 함께 하고, 자신이 하나의 살아 있는 인격체로서 인정을 하고 인정을 받는 기초공동체였다. 그에 바탕을 둔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가장 중요한 공동체로 발돋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청계피복, 동일방직, 원풍모방,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타 등 대부분의 1970년대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가장 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같은 공동체 정서이다. 산업선교회와 가톨릭청년노동자회에 노동자들이 그렇게 몰려들었던 것도 이처럼 소모임이라는 새로운 인간관계, 새로운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 1987년 이후 새롭게 전개된 한국의 노동운동 또한 초기에는 노동조합의 각종 소모임을 비롯해서 노동조합 자체가 강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운동의 성격이 짙었다. 1987년 이후 울산의 현대 노동자들이 경험한 것도 이같은 노동공동체였다.(김준, 2006)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공동체운동의 성격을 급속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조합은 임금과 단체협약을 사용주와 대신 협상해주는 청부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작업장 안의 민주화와 노동조건 개선 투쟁에만 전투적으로 몰입한 결과 실제 임금과 노동조건은 그 이전에 견주어 해마다 두자릿수로 상승한 것이 사실이다.

 

죽어가고 있는 한국의 노동조합들

 

- 한국의 노동조합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솔직히 이제는 새삼스런 진단도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노동조합운동 안팎에서 그같은 지적과 분석과 비판이 줄을 이어 왔다. 노동조합도 이를 극복하고 치유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펼쳐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정말 지금 노동조합은 음식을 삼키지도 못하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말기암 환자처럼 죽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20107월부터 시행된 타임오프제와 함께 수많은 노동조합들이 전임자 임금을 제대로 주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특히 산별노조나 산별연맹의 경우가 더 심해서 재정악화와 함께 노동조합 활동의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만든 자유인들의 결사체이다. 때문에 당연히 노동조합 전임자는 회사가 임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들의 조합비로 조합 활동비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

- 한국 노동조합은 아직도 여전히 기업별 노동조합이다. 기업별 노동조합은 사실상 어용노조로 분류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의 최대 무기는 조합원수, 속된 말로 쪽수의 힘인데, 몇몇 대기업을 빼고는 기업별로 자본의 막강한 힘에 대항하는 이 쪽수의 힘을 발휘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은 기업별 노조는 결국 조합원들의 정체성을 회사 소속의 종업원이라는 정체성에 가두어 놓는다는 데 있다. 때문에 기업별 노조는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결사체로서의 노동조합이 아니라 회사에 예속된 종업원 노조에 불과하게 된다. 한국의 노동조합들이 꼭 그렇게 지금 종업원 노조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 산별노조운동이 오랫동안 지속돼 왔지만 산별 노조라 할지라도 무늬만 산별일 뿐 같은 산업 노동자로서의 정체성보다는 한 회사의 종업원이라는 정체성이 훨씬 더 강한 게 현실이다.

- 1987년 이후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대폭발 시기에는 기업별 노조의 이런 성격이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었다. 단결의 힘에 눈을 뜬 노동자들이 민주노동조합을 통해 작업장 안에서 똘똘 뭉쳐 기업주에 대항하면 기업주는 대항할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1987년 이후 매년 노동자들의 임금은 두자릿 수로 올랐고, 기업별 노조도 민주노동운동의 중심축으로서 세계 노동운동이 놀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자랑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생활세계를 국가와 자본의 지배 종속 아래 방치한 한국 노동조합운동

 

- 그러나 1997년 국제통화기금의 지배를 계기로 한국 노동조합운동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상황에 전혀 대응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후퇴만을 거듭하다 급기야 지금과 같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이른바 노동유연성의 도입은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노동자층을 만들어 내면서 노동자들의 단결을 밑에서부터 무너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 그리고 국가와 자본의 전방위 노조 무력화 정책에 대항하는 노동조합운동의 전략이란 것이 1년 열 두달 늘 구태의연한 총파업 구호뿐이었다. 이는 중소 영세 자영업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과 중소 영세기업 노동자들까지도 노동조합운동의 반대 세력으로 돌려놓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 이른바 신자유주의란 국가까지도 무장해제시키면서 일상생활에서부터 공공의 전 분야까지도 자본의 지배종속 아래 상품화하고 자본주의 시장에 개방하겠다는 것다. 그럼으로써 특히 미국의 소수 거대 금융독점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겠다는 정책이다.

-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결과적으로는 사실상 철저히 이같은 신자유주의를 도와주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부이지만 자본주의에 기생하는 기생충운동으로 변질되고 만 측면까지 있다. 세상에 삼성재벌과 북한에만 세습이 있는 줄 알았더니 조합원 자식에게 노동자 자리를 물려주기 위한 세습 단체협약이라니 기가막힐 따름이다.

-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자들의 일상생활 영역을 아예 자본의 독무대로 방치해버렸다. 그리고 노동자들 자신이 재벌 브랜드 상품을 앞장서서 구입하는, 재벌기업 배불려주는 만만한 후원자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떤 노동자 집에 들어가 보아도 가전제품에서부터 그 많고많은 일상생활의 상품을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노동자 1인 가족이 재벌 기업의 순이익에 기여한 액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일상생활을 자본의 지배 종속에서 탈환하는 운동: 협동조합운동

 

- 자본이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철저히 지배 종속시키려 하면 당연히 노동자들은 이를 탈환해 와야 한다. 그리고 이런 탈환 운동이 다름아닌 협동조합 운동이다. 협동조합운동은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항하여 노동자 일상생활의 협동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협동조합운동의 효시인 1844년의 로치데일 공평개척자조합도 영국의 해고자노동자들이 만든 것이었다.

- 국가권력과 자본이 공공의 영역을 자본의 지배종속 아래 팔아먹으려 한다면 당연히 노동운동은 이를 탈환해 와야 한. 그런데 대통령 선거를 통해 행정권력의 일부를,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입법권력의 일부를 노동자 친화의 권력으로 탈환해 온다고 해서 국가권력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민주정부 10년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당연히 노동정치는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밑에서부터 바꾸어나가는, 지역으로부터의 풀뿌리 정치운동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런데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협동조합운동을 투쟁력을 약화시키는 내부의 개량주의 운동, 또는 한가한 중산층의 운동 정도로 폄하하고 있었다. 참으로 어이없고도 무식하기 짝이 없는 편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맑스는 국가주의자가 아니었다. 맑스는 철저한 공동체주의자였다. 맑스는 국가를 폐지하고 자유인들의 연합체로서의 이상사회를 꿈꾸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만든 번역어 코뮤니즘(communism)은 사실 공동체주의로 번역했어야 마땅했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일관되게 자유인들의 연합체로서 협동조합운동을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엥겔스는 협동조합에 대해 오락가락하는 글들을 남기고 있다.

- 레닌과 스탈린은 철저한 국가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솔직히 공동체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국가권력을 획득하는 전략에서 협동조합운동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 때는 사회주의의 학교로서 협동조합운동을 매우 높게 평하가는 한편, 일단 국가권력을 잡은 다음에는 또 철저하게 협동조합운동을 개량주의 운동으로 부정하고 아예 국가 권력에 종속되 어용 조합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 198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7회 국제협동조합연맹 총회에서 레이들로 보고서와 함께 제출된 구소련의 스미르노프 보고서는 국가와 사회주의 정당의 지도 아래 협동조합이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선전했다. 나치와 구소련, 그리고 북한의 국가 소유 매체나 관변 앵무새 학자들이 하는 말이나 글은 놀랍도록 똑같다.

- 한국의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은 이같은 국가주의적인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의 이론에 영향을 다대하게 받은 측면이 강하다. 아직도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일부 간부들이 협동조합운동을 중산층의 한가한 운동 쯤으로 폄하하는 조류는 이런 배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지금 대부분의 산별 노조에는 재정사업단이 있어 조합의 재정 문제를 헤쳐나가려 한다. 재정사업단이 맨 먼저 생각하는 사업은 조합원들의 공동구매이다. 보험에서부터 등산복이나 명절 선물 등등 조합원들이 공동구매를 할 수 있는 물품은 생각해보면 정말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이런 공동구매는 반드시 탈이 난다는 것은 그간의 수많은 공동구매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이런 공동구매는 결국 조합이 중간 수수료를 챙기는 것이기 때문에 수수료율과 기타 관리상 반드시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의식주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의 직거래 공동구매를 1년 열두달 단결과 연대의 힘으로 관철시키는 것이 다름아닌 소비자 협동조합운동이다. 단순한 직거래 쇼핑몰이 아니라 조합원들 간의 인간관계를 밑에서부터 바꾸어 나가는 민주주의 학교로서의 협동조합운동이야말로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재정 문제 뿐만이 아니라 조합원 민주주의조차 실종된 상태에서 고사돼 가고 있는 노동조합운동의 거의 유일한 탈출구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최초의 노동단체는 공제회, 즉 협동조합이었다

 

-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은 1920년대부터 지극히 자연스럽게 노동자와 농민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이미 협동조합이 뜻하고 있는 바 상부상조의 두레공동체가 오랜 역사를 갖고 면면히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자본주의의 근대적 공장이 설립된 시기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대체로 19세기 후반 1894년으로 본다. 정미업 등에서 일본인들이 만든 공장이 생겨나고, 이때부터 동력을 사용한 공장이 하여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1911년 작성된 제4차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1904년 조선에는 공장이 정미업, 청주와 장유업, 요업, 철공업 기타 등 총 16개가 있었고, 5년 뒤인 1909년에는 85개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11년에는 252개로 늘어났고, 1919년에는 1,900개로 늘어났다. 이런 공장 증가와 더불어 근대 자본주의의 노동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노동단체도 조직되기 시작했다.

- 3.1운동 직후인 1920411일 서울 광무대에서 600여 명의 노동자와 사회운동가들이 모여 한국 최초의 전국 노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가 창립대회를 가졌다. 조선노동공제회는 1922년 해산될 때까지 전국에 걸쳐 대구, 평양, 안악, 개성, 인천, 예산, 정읍, 황주, 북청, 군산, 신천, 안주, 광주, 영흥, 신창, 안동, 경주, 해주, 청진, 진주, 강계, 삼진 등 20여 개 이상의 지회를 두었고, 지회들은 인근 소도시나 면사무소 소재지에 분회를 두기도 하였다. 회원 수가 무려 15,000여 명에 이르렀던 식민지 시대 강력한 노동단체였다. 주요 활동가들도 초대 회장이이었던 박중화를 비롯하여 박이규, 오상근, 백광흠, 김찬, 최창익, 차금봉, 강달영, 신백우, 윤덕병 등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모두 포함하여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었다.

- 조선노동공제회는 한국 최초의 노동자 잡지와 노동신문인 월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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