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의 기억, 원산 총파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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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거기, 지금 여기- 함께 읽는 노동자 운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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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진/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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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실미도>에서 ‘북한 혁명 찬양가’인 <적기가>가 나온다 해서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뒤 나도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가족과 함께 그 영화를 보았죠. 어느 장면에서 <적기가>가 나오는지 줄곧 신경 쓰면서 보았습니다. 내가 남다르게 그 노래에 관심을 기울인 까닭이 있습니다. 1929년 원산 총파업 때 노동자들이 함께 불렀다는 <적기가> 때문입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조선 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은 《격정시대》라는 자전 소설을 썼습니다. 그이는 원산 제2공립보통학교 다닐 때 직접 보았던 원산 총파업을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긴박한 공기에 휩싸였었다. 파업 노동자들은 자본가쪽 인원들이 화물선이나 창고 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사람 사슬로 피케트라인, 즉 감시선을 늘이고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 우렁차게 〈적기가〉를 부르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일제 식민지 권력과 자본에 맞서 80일 남짓 ‘계급 전쟁’을 벌였던 원산 총파업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원산 총파업은 어느 날 불쑥 터진 것이 아니라, 1920년대 노동자 대중의 투쟁과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 일어난 사건입니다. 식민지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아 가면서, 노동자 단체도 차츰 틀을 갖추죠. 1920년대 노동 운동 진영은 아주 빠르게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노동공제회를 비롯한 전국 노동자 조직을 잇달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대를 ‘조직의 시대’라고 부를 만큼 여러 단체가 나타났습니다. 1924년에 만든 노농총동맹이 “우리는 노동 계급을 해방하고 완전한 신사회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강령을 내걸을 만큼, 노동단체들은 사회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노동자 수가 늘고 노동자 의식이 새롭게 움트면서 노동자 파업 투쟁도 발전하기 시작했죠. 파업을 일으키는 곳이 해마다 늘고 파업 전술도 갈수록 나아졌습니다. 이미 1921년 9월에 부산 부두노동자들은 동맹 파업을 크게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조직과 이론 그리고 노동자 대중 투쟁이 발전하던 1920년대 노동 운동의 끝자락에서 원산 총파업이 일어나게 됩니다. 일제는 갈대밭만 무성하던 원산 나루를 1880년에 개항한 뒤에 대륙을 침략하려는 발판으로 만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빠르게 도시로 탈바꿈하는 원산에 노동자가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크고 작은 노동자 투쟁이 이어졌고, 여러 노동단체가 생겨났겠죠. 활동가들은 1925년에 원산 지역 노동조합을 묶어 원산노동연합회를 만들었습니다. 이 원산노동연합회가 총파업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식민지 시대 노동 운동의 큰 봉우리였던 원산 총파업도 아주 작은 사건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원산에서 좀 떨어진 문평제유공장에서 일본인 감독이 조선 노동자를 때린 사건에서 총파업 불씨가 생겼습니다. 1928년 9월 8일 노동자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 회사에 항의했죠. 그들은 ‘문평제유노조’를 만들고 원산노련에 가입했습니다. 뒤이어 ‘문평제유노조’ 노동자들은 감독을 파면하고 최저 임금제를 실시하라면서 파업을 벌였습니다. 노동자들의 기세에 눌린 회사쪽에서는 3개월 뒤에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면서 노동자와 타협했습니다. 약속한 날이 다가오자 원산노련이 단체협약안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모든 노동단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직공과 직접 해결한다”면서 거절했습니다. 이에 맞서 문평제유노조는 다시 파업을 벌였고 원산노련 산하 단체는 문평제유회사 화물을 다루지 않기로 했습니다. 1929년 1월 23일, 총파업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자본가와 일제는 원산노련이 만든 선전문을 압수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파업을 고립시키려는 ‘선전전’도 펼쳤습니다. 그들은 노동조합이 법을 어겨가면서 너무 자주 임금을 올리라고 요구하고 있으며 다른 노동자를 억지로 파업에 끌어들인다고 우겼습니다. 파업은 시민 생활을 불편하게 만들며 원산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말을 해대면서 대중을 분열시키려 했죠. 일제 경찰도 ‘비상경비’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신문은 이렇게 상황을 전합니다. 1월 23일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파업 노동자 떼와 이들의 뒤를 따라다니는 순사 떼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자못 험악한 분위기 속에 빠져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돌발할는지 모르겠다. 25일, 원산 일대는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노동자 규찰대와 경계하는 경관 사이에 때때로 충돌이 일어났다.(《동아일보》, 1929. 1. 26) 불빛에 비치는 경관대의 칼자루는 한층 더 빛나 원산은 완전히 계엄 상태에 빠져 있는 듯했다.(《동아일보》, 1929. 2 .10) 이뿐 아니었습니다. 일본군 제19사단 함흥보병대 3백 명과 재향군인 4백 명, 소방대원 천 명이 완전 무장하고 시가를 행진해서 공포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죠. 원산 자본가 안마당이었던 원산상업회의소는 ‘위력단’이라는 폭력 조직을 만들어 파업 파괴에 발 벗고 나섰습니다. 일제가 온갖 탄압을 퍼부었지만 원산 노동자가 오랫동안 파업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가 끝까지 싸우려는 의지를 보이면서 굳게 단결한 때문이었습니다. 2월 중순부터 파업단의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 추운 겨울에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 생활은 말할 수 없이 힘들었겠죠. 그런 가운데서도 “한 잔의 술, 한 개피의 담배, 한 푼의 낭비도 반동”이라는 구호 아래 점심도 굶고 술과 담배를 끊어 모은 돈으로 파업 기금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원산노련은 계획을 잘 세워 파업을 이끌었습니다. 일제 경찰과 깡패조직에 맞서 파업을 지키려고 규찰대를 조직한 것이 좋은 보기입니다. 규찰대는 파업 동안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파업 대열 가운데 가장 믿음직한 전투부대였습니다. 그러나 파업은 더 번지지 못한 채, 원산에서 고립되었습니다. 쏟아지는 탄압 속에서 4월 초순, 흥분한 노동자 몇 십 명이 어용노조인 함남노동회를 습격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일제는 이것을 빌미로 기마헌병대를 풀어 닥치는 대로 노동자와 간부를 검거하면서 총파업의 숨통을 완전히 끊으려 했습니다. 그때 상황은 “마치 전시 상태와 비슷했다”고 전합니다. 엄청난 탄압 속에서 원산 총파업은 끝내 패배하고 말았지만, 식민지 역사에서 화려한 ‘투쟁의 기억’을 남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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