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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드라마 하나를 꼬박꼬박 챙겨 보고 있다. 이름하야, 베토벤 바이러스인데.
음악 영화는 하나도 놓친 것이 없다고 자부할 정도로;;;;;
영화는 꼬박꼬박 챙겨봤지만
소문난 노다메 칸타빌레 같은 드라마는 아직 보지 못해서인지
베토벤 바이러스는 드라마로서 신선하고 흥미진진하다.
게다가 작가가 홍 뭐시기 뭐시기 해서, 드라마계에서 유명한 '홍자매'인줄 알았더니
-그래서 지난 작품하고의 그 뭔가의 공통점이 없어 의아해 했더니
그 홍자매가 아니라,
다른 홍자매였더라.

게다가 알고보니 이 또 다른 홍자매가 소설가 홍성원 선생의 딸들이었다.
홍성원 선생이 지난 5월에 죽었다던데,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길게길게 듣는 기분이다.


연출은 다모와 패션 70을 찍었던 이재규pd인데,
마지막으로 재미있게 본 한국 드라마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다모'라고 대답할 것이기 때문에
베토벤 바이러스를 볼만한 이유는 충분히 되는 것 같다.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단연코 "강마에"라는 인물이다.
까칠한 칸트같은 인물인데, 이 인간의 8할은 열등감이다.
최고의 지휘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의 열등감은 그를 만들고, 그를 뱉어내고, 그를 단련시키고, 그를 내동댕이친다.
이 8할의 열등감 가운데에는 라이벌 친구가 있는데
이름하야, 정명환 - 정트리오의 정명훈 지휘자의 이름을 딴
천재 지휘자이다.
사실 정명환과 강마에는 라이벌이기는 하나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어린시절 강마에는 정명환을 뛰어 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고,
정명환 역시 그러고 싶었으나 강마에를 뛰어넘지 못했다.

그러나 강마메는 자신을 지독한 연습벌레로 규정하고,
그 지독한 연습벌레는 자신을 완성시키지만 결국 천재의 하늘이 주신 재능은 뛰어넘지 못하는 굴레가 된다.

이러한 열등감은 결국 천재로 보이는 한 젊은 청년에게 투사되는데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그 인물이 보이는 천재성을 사랑하면서, 부러워하면서, 그러면서 질투한다.
여기에 사랑이 얽히면서 같은 이름의 두 강건우가 서로를 뛰어 넘을 수 없는 강력한 운명이 된다.

그러나 이야기의 구도와 인물의 캐릭터, 게다가 극적 장치까지 나무랄데가 없는 이 드라마에도
안타까운 헛점이 있다.
문제는 천재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 천재성으로 어떻게 대립구조가 완성되느냐의 문제이다.
이것은 단순한 설정의 문제가 아니라 굉장히 섬세하고 까다로운 작법의 기술적 문제이다.

이 드라마에서 천재성을 규정하고 풀어나갈 때 강마에-정명환의 구도는 무척이나 흥미롭고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이 구도가 강건우-강건우로 갔을 때에도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느냐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강마에가 강건우의 천재성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강건우가 강마에의 라이벌로 등장할 수 있는가?
아무리 현실적인 측면을 파괴하여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도,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 
소재가 클래식이기 때문이다.

클래식은 불행하게도 "놀라운 해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클래식에 "놀라운 해석"을 했다면 그것은 클래식이 아니라 재즈가 된다. 
지휘자의 탁월한 해석? 탁월한 해석이란게 무엇인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의 어느어느 마디의 크레센도를 무시하는 것이 "탁월한 해석"인건가?

이 전제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강건우-강건우의 대립 구도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드라마에서
강건우-강건우의 대립 구도를 완성시키려고 하면 할 수록 극은 삐걱거린다.
왜 강마에가 강건우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지 납득이 되지 않고,
평론가들의 오버- 스승과 제자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말로도 충분할 그것이, 강마에보다 훨씬 낫다고
표현하는 것에 납득이 되지 않는다.

수십년간 음악계에 몸담고 있고, 오케스트라 경력 또한 긴 유명단원들을 데리고 있는 지휘자의 음악과
그렇지 못한 지휘자의 오케스트라들이 만들어내는 음악만을 비교해도 그렇다. 
거기에 강력한 지휘자의 역량을 더한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강건우가 강마에를 뛰어 넘을 수 있다고,
그래서 강마에가 위기 의식과 질투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되는가?

나는 5살에 유치원 선생님이 퐁당퐁당을 치는 걸 보고 바로 피아노로 올라가 양손을 따로 놀려
왼손은 반주를, 오른손은 멜로디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는데,
내가 극 속으로 들어갔다면 나를 서혜경이나 임동혁이 질투하고 라이벌 의식 느끼고
나 때문에 당장의 자신의 자리에 위기 의식을 느끼는 거나 마찬가지인거다.
요즘 티비에 종종나오는 5살 트로트 신동들 때문에 송대관 태진아는 그 애들을 질투하고 위기 의식을 느끼며
나쁜 맘을 가진 사람은 그 애들을 음해하고 앞길을 막기도 해야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거다.
 
내가 진짜 천재인지, 트로트 신동이 천재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강마에의 청음 테스트에서 몇 개의 음을 눌러 계이름을 맞추는 걸 했다고 해서 음악의 천재가 된다면
아마 국민의 몇십 퍼센트는 아마 천재일거다.

합리적인 일상적 상식을 던지고 극에 빠져든다고 해도 이런 설정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 주변에는 흔히 음악과 예술과 지휘자와 천재에 대한 과장된 오해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강건우-강건우의 대립 구도는 이 오해를 감안하고서라도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클래식의 천재성은 그렇다면 어디서 발현되는가? 그것은 응당  테크닉에서 발현된다.
테크닉은 그렇다면 어떻게 완성되는가? 집중적인 연습과 많은 시간의 투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휘자로서의 테크닉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곡의 완벽한 소화, 많은 레퍼토리, 오케스트라라는 악기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아니겠는가.

드라마에서
오보에를 불때 소리와 손이 맞지 않는다든지, 리드를 너무 깊게 문다든지, 피아노를 칠 때 손가락이 건반을 스치기만 한다든지, 최고의 지휘자가 질투를 느낄정도의 젊은 천재 지휘자의 지휘가 너무 좌우 대칭이라든지, 악기 대 지휘는 전혀 없어 무슨 합창단 지휘같다든지 하는 것은 하나도 거슬리지 않는다.
그건, 그럴 수 있다. 완벽하게 재현하면 더 좋겠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더 많은 것들을 즐길 수 있겠지만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전제와 인식, 규정으로 극이 틀어지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다.
왜? 재미가 없어지니까. ㅠㅠ



p.s 이재규 피디는 아무래도 천재와 범인의 대결 구도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패션70의 내용도 천재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이 사람이 천재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이 천재인가?"를 규정하는 것에는 좀 더 많은 생각을 가질 필요는 있는 것 같다.
패션70 역시 그 성공 스토리에서 여자주인공이 왜 패션계의 천재인지 전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패션계의 천재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또 천재가 패션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천재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 차원에 접근하자면 매우 유치하기 짝이 없는 수준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선천적이고 탁월한 재능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차라리 운동이 어떠한가?
노력해도 노력해도 마이클 조던이 될 수는 없는 거니까.
물론, 밤새 드리블 1000번, 슛 1000번을 했던 마이클 조던은 이 말을 들으면 화가 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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