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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기념관은 오랫동안 정의롭고 숭고했던 자국의 전쟁 역사를 보여줌으로 국방의식과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해 존재해왔다. 이는 많은 전쟁 기념관들이 20세기 서구사의 거대한 비극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이 채 수습되기도 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즉 전쟁을 경험한 이들이 여전히 생존하고 대치하는 상황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전쟁 기념관은 필연적으로 거대한 건축 공간 속에서 '국가를 위한 죽음'을 찬양하는 비극적 영웅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을 보여주는 방식 역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비슷하다. 대부분의 전시는 전쟁의 발발 원인과 전개 과정, 그리고 그로 인한 참상과 승리의 기쁨을 특정한 시대 상황 속에서 보여주기 위해, 전투 현장을 재현한 모형과 디오라마, 특수 음향과 영상 및 조명 효과 등을 동원한다. 전시 구ㅇ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늠름한 기상을 자랑하는 마네킹들과 전선의 모형, 실제 무기나 전차, 군장비들의 실물들은 현장감을 살려 적들의 위협과 도발을 과장하는 데 이용된다. 이처럼 전쟁 기념관은 국가의 존재가 '보이는 동시에 숨어 있는 곳'이다(가오리 2007:232). 비록 전시 구성이나 프로그램이 정부의 방침에 의해 직접적으로 좌우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전쟁 기념관의 궁극적 목적은 공중을 동원해 호국 의지를 다져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파국을 경험하고 증언할 수 있는 세대가 서서히 논을 감고 있는 현 시점에서 과연 이러한 "과잉"의 전시와 기념 문화가 전쟁에 대한 다음 세대의 올바른 역사 이해와 해석에 기여하는지 의문이다.(가오리 2007: 232) 

가오리 지노(2007[2000]), 박소현 역, <전쟁과 식민지의 전시: 뮤지엄 속의 일본>, <<전시의 담론>>,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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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터 벤야민(2007: 123)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를린 시내의 전승기념탑이나 전몰자들을 추모하는 행위가 급증하는 풍경을 두고 죽은 자들의 유령을 "봉인"하고 그들의 희생을 숭고한 것으로 미화해 과거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처럼 가장한다고 우려했다. 사람들에게 "손쉬운 보상"을 제공하는 기념 행위들이 죽은 자들을 통해 산 자들의 이야기와 권력을 만들어내는 근대 국가의 폭력적 본질을 드러낸다는 것이다.(이영진2011: 164). 그 후 이어지는 많은 연구들은 현대 사회의 전쟁 기념을 향한 집단적 열망과 각종 전시나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전쟁의 극화나 회화화에 바탕한 서사야말로 신경증적으로 표출되는 '트라우마'의 한 형태라고 경고했다.( Lacapra 1996: 23-41: 전진성 2007:239-241). 아울러 그것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잠재하는 상처와 긴장,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더욱 더 심각한 갈등과 충돌의 징후라고 보았다. 

  1990년대 독일에서 선구적으로 나타난 반-기념물(Counter-momumnet)은 전통적 추모물이나 기념문화의 진부함과 권력화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념물, 즉 반-기념물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독일의 조각가 요헨 게르츠(Jochen Gerz)와 에스터 게르츠(Esther Shalev-Gerz) 부부는 제2차대전과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당한 유대인을 기리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함부르크 교외의 하르부르크라는 도시에 높이 12m의 거대한 알루미늄 기둥을 세웠다. 이민자 출신의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의 번잡한 상업지구에 주변 경관을 해치며 불쑥 솟아오른 이 검은 기둥의 표면에는 모두 7개의 국어(독일어, 불어, 러시아어,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터키어, 그리고 영어)로 각자의 이름이나 의견을 자유롭게 쓰라는 안내문이 쓰여 있었다. 사람들은 기둥의 모서리에 달린 쇠펜을 사용해 납으로 처리된 표면에 낙서를 하고, 그 낙서들이 채워지면 철필에 달린 기둥은 조금씩 땅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도심의 행인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던 이 기둥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의 표현뿐만 아니라 분노와 원망, 미움을 표현하는 언어들과 욕설-심지어 나치의 상징문양들까지-들로 가득 채워졌다. 약 7만 명의 서명과 각종 낙서들을 머금은 이 구조물이 땅 속으로 잠겨진 것은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93년이었다. 

 

나일민, 「포스트 메모리 세대 전쟁 기념관에서의 동시대 미술 전시」, [현대사와 박물관], 제2권, 2019년 12월, 대한민국연사 박물관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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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ther Shalev-Gerz와 Jochen Gerz

https://www.shalev-gerz.net/portfolio/monument-against-fascism/

Monument against Fascism, Hamburg-Harburg (198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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