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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보 형정도첩

지.리 2021. 3. 1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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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의 시각화: 20세기 초 김윤보의 《형정도첩》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을 살면서 자신이 범죄에 연루되어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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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죄와 벌의 시각화: 20세기 초 김윤보의 《형정도첩》|작성자 문화재청

문화재, 우리에게 오다 죄와 벌의 시각화: 20세기 초 김윤보의 《형정도첩》

 문화재청  2020. 1. 22. 15:10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을 살면서 자신이 범죄에 연루되어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일 방송과 신문 등에 보도되는 사건과 사고로 인해 자의든 타의든 죄와 벌이 우리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상적이지도 않고 꺼리어 멀리하고 싶지만 자칫 자신에게도 닥쳐올 수 있다는 죄와 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은 죄와 벌을 미술 표현의 대상으로 금기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죄와 벌의 오랜 역사성 속에서, 그 시각화는 동서를 막론하고 종종 있어왔다. 특히 죄에 대한 형벌의 입안과 집행은 국가의 독점 권한이었기 때문에, 백성을 통제하는 정치권력의 중요한 통치수단이었다. 근대 이전의 형벌의 시각화는 개인감정의 표현이나 감상과 같은 사적인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 혹은 사회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 평양에서 활동했던 화가 김윤보(金允輔, 1865~1938)의 《형정도첩(刑政圖帖)》(개인 소장)은 남아있는 우리나라 형벌 그림 중 단연 독보적이다. 조선시대 형벌의 집대성이라고도 불릴만한 다양한 종류의 형벌 그림 48점이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하당독서(夏堂讀書)>라는 작품으로 입선할 만큼 산수화에 능했고 경직도 같은 농가 풍속을 주로 그렸던 김윤보가 특별한 주제인 형벌 풍속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형정도첩(刑政圖帖)》을 제작한 원인을 추정할 수 있는 당시 자료들이 남아 있다.

하나는 1936년 치형협회(治刑協會)에서 간행한 나카하시 마사요시(中橋政吉)의 《조선시대의 형정(朝鮮舊時の刑政)》이다. 서문에 의하면 나카하시가 형무관으로 조선에 파견되고 13년 동안 조선시대 형정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조선인들의 구술을 참고해서 집필한 것이라고 한다. 나카하시는 김윤보의 《형정도첩》 중 5장면을 이 책에 게재하였는데, 조선의 옛 감옥 모습이나 형벌의 방법, 형구 등을 서술할 때 시각적인 참고 자료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역시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런데 나카하시의 뒤에는 조선총독부라는 일제의 거대 식민통치기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형정》에는 모리우라 후지오(森浦藤郞)의 서문이 들어가 있는데, 모리우라는 조선총독부 검사국의 검사였다. 그는 1921년 도쿄제국대학교 법학부 영법학과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부터 조선총독부 관료로 활동하였다. 1922년에 경성지방법원 사법관 시보(試補)로 처음 부임한 이후 대구지방법원, 경성지방법원, 신의주지방법원, 고등법원, 경성복심법원 등에서 검사로 근무했다. 특히 1933년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검사로 취임하면서 조선 사회주의 운동 탄압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러한 조선총독부 최고의 권력을 가진 모리우라가 형무관 나카하시의 저술을 독려한 것이다.

그리고 나카하시가 책을 낸 이듬해인 1937년 조선총독부 법무국 행형과에서도 김윤보의 《형정도첩》 48점을 전부 실은 《사법제도연혁도보(司法制度沿革圖譜)》를 제작했다. 이 책의 범례(凡例)에 의하면 ‘옛날 재판에 관한 자료가 산일하여 쉽게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일본 도쿠가와시대(德川時代)의 것과 한국시대(韓國時代)의 것을 모아서 구분하여 실어 놓았다. 이는 집무에 참고하기 위한 것으로 사법부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에 따라서 앞부분에는 일본의 형정풍속도를, 뒷부분에 김윤보의 《형정도첩》을 해설과 함께 실었다. 나카하시의 책을 참고하여 우리나라 형정과 함께 일본의 형정풍속을 함께 편집하여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범례에서 ‘한국시대’를 ‘도쿠가와시대’와 병치하여 놓음으로써 당시 일제의 지배에 놓여있는 ‘조선’을 이전의 ‘한국시대’, 즉 대한제국시대와 구분하고 도쿠가와시대처럼 흘러간 역사로 본 것이다. 《사법제도연혁도보》나 개인 연구서인 나카하시의 《조선시대의 형정》에서조차도 조선총독부와 관련되어 있고, 특히 조선총독부 사법부 직무 자료로 활용하고자 했던 정치적인 제작 목적을 공공연히 드러냈던 것이다.

김윤보의 《형정도첩》에는 조선시대의 형벌인 오형[사형(死刑), 유형(流刑), 도형(徒刑), 장형(杖刑), 태형(笞刑)]을 비롯한 각종 고문형 등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시대 형벌은 당(唐) 이래의 오형제도를 근간으로 한 명률(明律)을 중심으로 하고 명률 외의 조선 고유의 각종 형벌을 만들어 적용하였다.

김윤보의 《형정도첩》 중에는 관가를 배경으로 죄인이 치도곤을 맞는 장면인 <종로에서 치도곤을 치다(鐘路結杖治盜棍打)>가 있다.

치도곤은 곤장의 다섯 가지 종류 중 하나로 포도청, 유수, 감사, 통제사, 병사, 수사, 토포사, 겸토포사, 변방의 수령, 변장(邊將) 등이 도적으로 다스리거나 변방의 군무(軍務)인 변정(邊政) 등에 관계된 일에 쓸 수 있었다. 그림의 화제에 ‘종로(鐘路)’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김윤보의 활동 무대가 평양이었던 것으로 보아 평양의 종로인 것으로 보인다. 종로라는 지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보아 평양 종로에서 일어난 실제 형벌 집행을 직접 보고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김윤보가 평양 감영의 화원 죽리(竹里) 김기엽(金基燁)의 제자로 있으면서 형정을 포함한 관청 관련 업무를 자주 보았던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또 김윤보의 《형정도첩》 중 특이한 장면은 여성 죄인들을 묘사하였다는 것이다. <군수가 죄인 여성을 초달(회초리)하다(郡守楚橽罪女)>, <죄인 여성을 태장 치다(笞伐罪女)>, <음란에 빠진 죄인 여성을 잡아 때리다(捉去打婦人䧟淫罪女)>가 그것이다. <죄인 여성을 태장 치다(笞伐罪女)>의 경우 <군수태벌죄인(郡守笞伐罪人)>와 같은 남성 죄인과 달리 속옷을 입은 채 볼기를 맞는 장면으로 묘사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녀자의 경우 간음한 여성을 제외하고 옷 위에 물을 뿌린 상태로 형을 집행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김윤보의 《형정도첩》은 일제강점기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지만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형벌 그림으로는 가장 많은 장면을 포함하고 있어 조선시대 형정사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인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신선영>

[출처] 죄와 벌의 시각화: 20세기 초 김윤보의 《형정도첩》|작성자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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